성경본문: 사무엘상 20장 1절 - 3절
사울 왕의 추적을 피해 다윗은 선지자 사무엘을 찾아왔습니다. 살기가 등등했던 사울 왕은 다윗이 선지자 사무엘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다윗을 잡아오려고 세 번이나 군사들을 보냅니다. 하지만 그들은 번번이 성령님의 역사로 다윗에게 접근도 하지 못합니다. 결국 나중에는 사울 왕이 직접 다윗을 잡으러 그곳에 왔지만 그 역시 성령님의 역사로 다윗에게 가까이 가지도 못합니다. 일종의 환각상태에 빠져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모르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다윗은 선지자 사무엘을 떠나 피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다윗이라면 당연히 모든 두려움과 걱정과 염려를 떨쳐버리고 자신을 위해 친히 표적과 기적을 보여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더욱 담대하게 나아갔을 텐데, 우리 성경은 그런 다윗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세 번씩이나 군사들을 보냈지만 다윗에게 손도 대지 못하게 하셨고, 나중에는 사울 왕이 직접 잡으러 왔지만 이 또한 강력하게 막으셨던 하나님의 역사를 보면 다윗의 믿음이 더 견고해지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성경에는 그런 다윗의 모습이 나오지 않습니다. 다윗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손길이 분명해도 이미 다윗은 그걸 보지 못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제 그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죽이려고 살기가 등등해 있는 사울 왕만이 그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결국 다윗은 이로 말미암아 생각지도 못한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다윗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윗이 단 한 번의 실수도 없는 완벽하고 완전한 삶을 산 것은 아닙니다. 그도 연약한 인간이기에 사람으로서 저지를 수밖에 없는 많은 실수와 허물 속에서 살아갑니다. 우리가 왜 성경을 믿을 수 있습니까? 어느 신학자는 성경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경은 어떤 위대한 사람에 대해서도 결코 아첨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성경은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의 인생을 미화시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위대하고 믿을만 한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조상이었던 아브라함은 어떻습니까? 성경은 아브라함이 저질렀던 수많은 실수와 실패, 추악한 죄악을 조금도 감추지 않고 그대로 다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이 이렇게 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입니다. 이는 다윗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 마음에 꼭 맞는 사람이었지만, 그 역시 무섭고, 더럽고, 추악하고, 몸서리쳐지는 실수들을 저지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 때문에 실망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이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랬기에 하나님은 그런 일로 다윗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완벽하고 완전한 사람만 쓰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부족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를 들어 쓰십니다.
다윗은 결국 사무엘 선지자 곁을 떠납니다. 사무엘 선지자 곁을 떠난 다윗은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오히려 사무엘 선지자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지도를 바랬어야 했으나 다윗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이제 다윗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이제 자기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를 씁니다. 결국 그가 택한 해결책은 친구 요나단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왜 요나단을 찾았는지 우리는 그 이유를 요나단에게 한 말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죄악이 무엇이며, 네 부친 앞에 나의 죄가 무엇이관대 그가 내 생명을 찾느냐?” 다윗이 요나단에게 던진 이 질문에는 그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질문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나’라는 단어입니다. 이제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계시질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생각 속에 전혀 떠오르질 않습니다. 끊임없이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 왕의 위협으로 인해 다윗이 완전히 탈진해 버린 것입니다. “여호와여,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내 영혼이 피곤하니이다.”다윗은 언젠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자꾸 지체되니 그의 영혼이 피곤하다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영혼이 피곤한 상태, 지금 다윗이 처해 있는 상태입니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길래, 도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도대체 내가 사울 왕에게 무슨 일을 했길래, 그가 나를 죽이려고 이토록 나를 쫓아다니고, 나를 괴롭히는가? 그는 탄식하고 있습니다. 피곤에 찌든 모습입니다.
회의와 불안과 두려움에 빠진 한 사람을 우리는 이 질문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탈진 상태는 다윗을 더욱 비참한 불신앙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그는 “나와 사망의 사이는 한 걸음뿐이니라.”고 탄식합니다. 살고 죽는 것이 한 걸음 차이라는 말입니다. “나로 죽은 지 오랜 자 같이 흑암한 곳에 거하게 하였나이다.”다윗은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나와 사망의 차이는 한 걸음뿐이라는 말은 죽음의 두려움에 사로잡힌 다윗의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것 같습니다. 때로는 죽음이라는 것이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 한 걸음 차이로 어떤 사람은 이 세상을 떠나고, 또 어떤 사람은 이 땅에 살고 있습니다. 피곤과 두려움은 다윗으로 하여금 그 믿음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다윗으로 하여금 더 깊은 늪으로 빠지게 합니다.
우리는 다윗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성도가 범사에 주를 인정하지 않으면 얼마나 많을 것을 잃어버리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 너무나 많은 것들을 상실합니다. 이보다 더 나쁜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나의 영혼이 더 이상 하나님과 만나지 않는 것입니다. 피곤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영혼이 피곤한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이로 인해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이 지경에 이르면 시험이 찾아옵니다. 시험을 이길 힘이 없습니다. 시험을 이길 능력이 없습니다. 시험을 분별할 지혜가 사라집니다. 결국 더욱 나쁜 죄를 짓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죄인 줄을 깨닫지 못합니다. 불신앙의 척도, 불신앙을 잴 수 있는 기준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죄에 대한 마음의 경계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서도 그것이 죄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신앙의 척도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신앙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죄를 분명하게 분별하는 지혜가 생깁니다. 무엇이 죄인지 아닌지를 깨끗하게 판단하는 지혜가 생깁니다. 물론 여기서 죄란 나의 죄입니다. 다른 사람의 죄가 아니라, 나의 죄입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판단하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는 나의 죄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로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시험이 다가오더라도 그 시험에 빠지지 말게 하옵시고, 악에서만은 꼭 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던 다윗에게도 이토록 무덥고, 고통스럽고, 짜증나고, 피곤하고, 기도의 줄도 잡히지 않는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다윗을 끝까지 지켜주십니다. 오늘 우리 중에도 그런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영혼이 피곤한 모든 성도님들을 끝까지 붙잡아 주시리라 믿습니다. 특히 중한 병으로 인해 피곤한 삶을 살아야 하는 여러 성도님들을 하나님께서 붙들어주시고, 놓지 않으시고, 낫게 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사울 왕의 추적을 피해 다윗은 선지자 사무엘을 찾아왔습니다. 살기가 등등했던 사울 왕은 다윗이 선지자 사무엘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다윗을 잡아오려고 세 번이나 군사들을 보냅니다. 하지만 그들은 번번이 성령님의 역사로 다윗에게 접근도 하지 못합니다. 결국 나중에는 사울 왕이 직접 다윗을 잡으러 그곳에 왔지만 그 역시 성령님의 역사로 다윗에게 가까이 가지도 못합니다. 일종의 환각상태에 빠져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모르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다윗은 선지자 사무엘을 떠나 피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다윗이라면 당연히 모든 두려움과 걱정과 염려를 떨쳐버리고 자신을 위해 친히 표적과 기적을 보여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더욱 담대하게 나아갔을 텐데, 우리 성경은 그런 다윗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세 번씩이나 군사들을 보냈지만 다윗에게 손도 대지 못하게 하셨고, 나중에는 사울 왕이 직접 잡으러 왔지만 이 또한 강력하게 막으셨던 하나님의 역사를 보면 다윗의 믿음이 더 견고해지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성경에는 그런 다윗의 모습이 나오지 않습니다. 다윗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손길이 분명해도 이미 다윗은 그걸 보지 못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제 그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죽이려고 살기가 등등해 있는 사울 왕만이 그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결국 다윗은 이로 말미암아 생각지도 못한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다윗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윗이 단 한 번의 실수도 없는 완벽하고 완전한 삶을 산 것은 아닙니다. 그도 연약한 인간이기에 사람으로서 저지를 수밖에 없는 많은 실수와 허물 속에서 살아갑니다. 우리가 왜 성경을 믿을 수 있습니까? 어느 신학자는 성경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경은 어떤 위대한 사람에 대해서도 결코 아첨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성경은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의 인생을 미화시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위대하고 믿을만 한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조상이었던 아브라함은 어떻습니까? 성경은 아브라함이 저질렀던 수많은 실수와 실패, 추악한 죄악을 조금도 감추지 않고 그대로 다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이 이렇게 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입니다. 이는 다윗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 마음에 꼭 맞는 사람이었지만, 그 역시 무섭고, 더럽고, 추악하고, 몸서리쳐지는 실수들을 저지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 때문에 실망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이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랬기에 하나님은 그런 일로 다윗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완벽하고 완전한 사람만 쓰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부족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를 들어 쓰십니다.
다윗은 결국 사무엘 선지자 곁을 떠납니다. 사무엘 선지자 곁을 떠난 다윗은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오히려 사무엘 선지자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지도를 바랬어야 했으나 다윗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이제 다윗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이제 자기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를 씁니다. 결국 그가 택한 해결책은 친구 요나단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왜 요나단을 찾았는지 우리는 그 이유를 요나단에게 한 말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죄악이 무엇이며, 네 부친 앞에 나의 죄가 무엇이관대 그가 내 생명을 찾느냐?” 다윗이 요나단에게 던진 이 질문에는 그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질문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나’라는 단어입니다. 이제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계시질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생각 속에 전혀 떠오르질 않습니다. 끊임없이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 왕의 위협으로 인해 다윗이 완전히 탈진해 버린 것입니다. “여호와여,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내 영혼이 피곤하니이다.”다윗은 언젠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자꾸 지체되니 그의 영혼이 피곤하다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영혼이 피곤한 상태, 지금 다윗이 처해 있는 상태입니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길래, 도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도대체 내가 사울 왕에게 무슨 일을 했길래, 그가 나를 죽이려고 이토록 나를 쫓아다니고, 나를 괴롭히는가? 그는 탄식하고 있습니다. 피곤에 찌든 모습입니다.
회의와 불안과 두려움에 빠진 한 사람을 우리는 이 질문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탈진 상태는 다윗을 더욱 비참한 불신앙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그는 “나와 사망의 사이는 한 걸음뿐이니라.”고 탄식합니다. 살고 죽는 것이 한 걸음 차이라는 말입니다. “나로 죽은 지 오랜 자 같이 흑암한 곳에 거하게 하였나이다.”다윗은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나와 사망의 차이는 한 걸음뿐이라는 말은 죽음의 두려움에 사로잡힌 다윗의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것 같습니다. 때로는 죽음이라는 것이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 한 걸음 차이로 어떤 사람은 이 세상을 떠나고, 또 어떤 사람은 이 땅에 살고 있습니다. 피곤과 두려움은 다윗으로 하여금 그 믿음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다윗으로 하여금 더 깊은 늪으로 빠지게 합니다.
우리는 다윗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성도가 범사에 주를 인정하지 않으면 얼마나 많을 것을 잃어버리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 너무나 많은 것들을 상실합니다. 이보다 더 나쁜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나의 영혼이 더 이상 하나님과 만나지 않는 것입니다. 피곤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영혼이 피곤한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이로 인해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이 지경에 이르면 시험이 찾아옵니다. 시험을 이길 힘이 없습니다. 시험을 이길 능력이 없습니다. 시험을 분별할 지혜가 사라집니다. 결국 더욱 나쁜 죄를 짓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죄인 줄을 깨닫지 못합니다. 불신앙의 척도, 불신앙을 잴 수 있는 기준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죄에 대한 마음의 경계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서도 그것이 죄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신앙의 척도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신앙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죄를 분명하게 분별하는 지혜가 생깁니다. 무엇이 죄인지 아닌지를 깨끗하게 판단하는 지혜가 생깁니다. 물론 여기서 죄란 나의 죄입니다. 다른 사람의 죄가 아니라, 나의 죄입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판단하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는 나의 죄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로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시험이 다가오더라도 그 시험에 빠지지 말게 하옵시고, 악에서만은 꼭 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던 다윗에게도 이토록 무덥고, 고통스럽고, 짜증나고, 피곤하고, 기도의 줄도 잡히지 않는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다윗을 끝까지 지켜주십니다. 오늘 우리 중에도 그런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영혼이 피곤한 모든 성도님들을 끝까지 붙잡아 주시리라 믿습니다. 특히 중한 병으로 인해 피곤한 삶을 살아야 하는 여러 성도님들을 하나님께서 붙들어주시고, 놓지 않으시고, 낫게 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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