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신회 작가의 책, 『꾸준한 행복』에 나오는 첫 번째 글의 제목이 〈위대한 지루함〉입니다. 지루함을 좋아하지 않는 시대에 ‘지루함이 위대하다’는 작가의 표현이 제게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지루함을 두려워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조금만 지루해져도 휴대전화를 집어 듭니다. 채널을 바꿉니다. 새로운 것을 찾습니다. 새로운 식당, 새로운 책, 새로운 경험, 새로운 도전, 새로운 자극을 원합니다. 현대 문화는 우리에게 지루함은 피해야 할 적이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쇠렌 키르케고르는 ”지루함은 모든 악의 뿌리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경계한 것은 ‘지루함 자체’라기 보다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의 태도입니다. 지루함을 피하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자극을 찾아다니면 삶은 오히려 얕아집니다. 피상적이 됩니다. 반대로 반복과 훈련의 지루함을 견디면 삶은 깊어집니다. 탁월함에 이르게 됩니다.
지루함의 역설이 여기에 있습니다. 지루함은 모든 악의 뿌리가 될 수도 있고, 모든 위대함의 뿌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지루함을 피하기 위해 쾌락을 추구하면 죄악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지루함을 견디며 한 우물을 파면 삶은 깊어집니다. 우리 안에 감추어진 선한 잠재력이 극대화됩니다. 그렇게 한길을 오래 걷다 보면 어느 순간에 탁월함의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피아니스트는 같은 음계를 반복해서 연습합니다. 골프 선수는 같은 스윙을 수백 번 반복합니다. 수영 선수는 같은 레인을 수천 번 오갑니다. 사진작가는 한 장면을 찍기 위해 며칠 동안 기다립니다. 화가는 같은 대상을 오래 바라봅니다. 작가는 매일 아침 같은 책상에 앉습니다. 목회자는 같은 성경을 펼치고, 같은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다시 기도합니다.
반복에는 화려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위대함은 종종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반복을 통해 자랍니다. 우리는 무대 위에 드러난 탁월함을 봅니다. 하지만 그 탁월함을 만들어 낸 무대 뒤의 시간은 보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승의 순간에 열광합니다. 하지만 그 순간을 위해 지루함을 견뎌 낸 반복된 훈련은 보지 못합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사진 한 장을 봅니다. 그러나 그 사진 이전에 찍힌 수천 장의 평범한 사진은 보지 못합니다. 우리는 완성된 책을 봅니다. 하지만 박수도 인정도 없는 수백 번의 아침을 홀로 견딘 작가의 시간은 보지 못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반복적으로 하는 행동이 바로 우리 자신이다. 그러므로 탁월함은 하나의 행동이 아니라 습관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반복은 습관을 낳습니다. 습관은 성품을 낳습니다. 성품은 우리 미래를 결정합니다. 저는 말씀 묵상을 통해 반복의 비밀을 깨달았습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 1:8). 말씀 묵상의 비밀은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는 데 있습니다. 주야로, 다시 하고 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진리는 한 번에 배울 수 없습니다. 반복해서 찾아가야 합니다. 머리에 머문 말씀이 마음으로 내려가고, 마음에 새겨진 말씀이 삶으로 나타날 때까지 반복해야 합니다. 그런데 반복에는 진실함이 필요합니다. 반복에도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성이 빠진 채 같은 행동만 되풀이할 수 있습니다. 기도도 기계적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예배도 기계적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결혼생활도 기계적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영성 훈련도 기계적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반복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반복에는 반드시 진실함이 더해져야 합니다.
진실함이란 익숙한 일을 새로운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탁월한 사람들은 익숙한 것 앞에서 새로운 주의를 기울이는 법을 배웁니다. 첼리스트 요요 마(Yo-Yo Ma)는 “초심자의 마음”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어제 어떤 연주를 했든 오늘의 연주는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기계적인 반복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음악이 담고 있는 이야기와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기 위해 기본기를 끊임없이 연마합니다. 이것이 진실함입니다. 진실함이란 오랫동안 해 온 일을 초심을 품고 다시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영적 성숙의 비밀 가운데 하나도 여기에 있습니다. 익숙함이 경이로움을 빼앗아 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꾸준함은 강렬함보다 강합니다. 많은 사람은 강렬하게 시작합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중단합니다. 위대한 삶은 가끔 찾아오는 강렬함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 지속되는 꾸준함을 통해 만들어집니다. 위대한 지루함이 위대한 반복을 만날 때 빛을 발합니다.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깊은 심심함을 이야기합니다. 끊임없는 자극과 활동에서 벗어난 깊은 심심함은 새로운 것을 잉태하는 창조적 공간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위대한 지루함과 깊은 심심함을 친구 삼아, 조용히 하던 일을 새 마음으로 반복합니다. 위대함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평범한 날들을 충실하게 반복하는 동안 조용히 우리 안에 형성됩니다. 위대한 지루함을 견디는 사람에게 위대한 깊이가 선물됩니다.
목양실에서 강준민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