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 《The Odyssey》가 극장가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지난 7월 17일 개봉한 이 영화는 호메로스의 고대 서사시 『오디세이아』를 스크린으로 옮긴 작품이다. 맷 데이먼이 이타카의 왕 오디세우스를 맡았고, 톰 홀랜드가 그의 아들 텔레마코스, 앤 해서웨이가 아내 페넬로페를 연기한다. 놀란은 이 오래된 신화를 현대의 대형 스크린 위에 되살리기 위해 새로운 IMAX 필름 기술을 사용해 세계 곳곳에서 촬영했다고 한다. 영화는 개봉 첫 주말 전 세계에서 2억 6천만 달러가 넘는 흥행 수입을 기록했고, 한 달도 되지 않아 10억 달러를 돌파했다. 8월 중순 현재 세계 흥행 수입은 12억 달러를 넘어섰다. 수천 년 전 이야기가 여전히 사람들을 극장으로 불러 모으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오디세이아』가 가진 서사의 힘을 가히 짐작케 한다.
『오디세이아』는 트로이 전쟁이 끝난 뒤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려는 오디세우스의 긴 여정을 다룬다. 전쟁은 끝났지만 그의 진짜 싸움은 그때부터 시작된다. 폭풍과 괴물, 유혹과 죽음의 위협을 지나면서 그는 무려 10년 동안이나 바다를 떠돈다. 그 수많은 이야기 가운데 특히 흥미로운 장면 하나가 사이렌을 통과하는 사건이다. 사이렌은 아름다운 노래로 지나가는 선원들을 유혹하여 배가 암초에 부딪히게 만든다. 그 노래를 들은 사람은 그것이 자신을 죽음으로 이끌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매혹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오디세우스는 이 위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선원들의 귀를 밀랍으로 막게 하고, 자신은 배의 돛대에 단단히 묶어 달라고 명령한다. 그는 사이렌의 노래를 직접 듣고 싶었지만 그 노래를 따라갈 수 없도록 자신의 몸을 묶어 놓았다. 욕망은 남아 있지만 행동은 통제한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는 사이렌을 통과하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이번에는 오디세우스가 아니라 아르고호의 선원들이다. 그 배에는 뛰어난 음악가 오르페우스가 타고 있었다. 사이렌의 노래가 들려오기 시작하자 그는 선원들의 귀를 막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악기를 들고 사이렌의 노래보다 더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했다. 선원들은 사이렌의 목소리가 아니라 오르페우스의 음악에 마음을 빼앗겼고, 그 위험한 바다를 무사히 지나갈 수 있었다.
두 이야기는 인간이 유혹을 대하는 두 가지 방식을 생각하게 한다. 하나는 자신을 묶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더 아름다운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다.
물론 절제는 필요하다. 성경은 죄를 피하라고 가르치며 때로는 우리 자신을 강하게 제한할 것을 요구한다. 예수님은 죄로 이끄는 것을 단호하게 끊어 버리라고까지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오디세우스처럼 자신을 ‘묶는’ 신앙적 결단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죄의 위험을 아는 사람에게 경계선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사람을 죄짓지 못하게 묶어 놓는 것만으로는 마음까지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몸은 돛대에 묶여 있어도 마음은 여전히 사이렌의 노래를 따라갈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새 언약을 설명하며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율법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정확하게 알려 준다. 죄가 무엇인지도 드러낸다. 그러나 율법의 명령 자체가 인간의 마음속 욕망을 제거해 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 말라”는 명령을 알면서도 하고 싶고, “사랑하라”는 말씀을 알면서도 미워하며, “용서하라”는 말씀을 들으면서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래서 새 언약에서 하나님은 돌판에 말씀 하나를 더 새겨 주신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바꾸기 시작하셨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새로운 소망과 새로운 욕망을 만들어 가신다.
여기에서 오르페우스의 이야기가 흥미로운 비유가 된다. 성령께서 죄를 이기게 하시는 방식은 단지 우리 귀를 막고 몸을 묶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성령은 우리에게 죄보다 더 아름다운 것을 보여 주신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세상의 쾌락보다 더 깊은 기쁨을 보여 주시고, 돈보다 더 귀한 가치를 알게 하시며, 성공보다 더 큰 영광을 바라보게 하신다. 결국 죄의 매력을 이기는 가장 강력한 힘은 더 강한 금지가 아니라 더 큰 사랑이다.
그래서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에 대해 말한다. 바울은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라고 했고, 예수께서는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인간은 자신이 가장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을 향해 움직인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금지당했느냐보다 무엇을 보물로 여기고 있느냐이다.
나는 선언하기 원한다. “복음은 우리의 보물을 바꾼다!”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세상이 가장 커 보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알기 시작하면 이전에 그렇게 매력적이던 것들이 조금씩 빛을 잃는다. 억지로 세상을 싫어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다. 더 좋은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같은 고린도후서 3장의 마지막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다 …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흥미롭게도 바울은 우리가 변화되는 방법을 ‘더 열심히 자신을 묶으라’고 설명하지 않는다. 주의 영광을 보라고 한다. 무엇을 오래 바라보느냐가 결국 우리를 닮게 만든다는 것 아니겠는가.
기독교 신앙은 평생 돛대에 묶여 살아가는 종교가 아니다. 물론 때로는 자신을 묶어야 한다. 귀를 막아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의 최종 목적은 아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사이렌의 노래보다 더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주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죄가 더 이상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그리스도가 아름다워지고, 세상이 전부가 아닌 것을 알 만큼 하나님 나라가 커지고, 내 뜻보다 아버지의 뜻을 더 사랑하게 되는 것. 그것이 성령이 만들어 가시는 변화이며 새 언약의 삶이다.
어쩌면 우리가 죄와 싸우면서 너무 자주 하는 질문은 “어떻게 하면 이것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인지 모른다. 그러나 복음은 조금 다른 질문을 던진다.
“나는 지금 무엇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가?”
사이렌의 노래를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어쩌면 평생 귀를 막고 사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더 아름다운 노래를 듣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까지 쓰고 나니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이렇게 오디세우스를 길게 이야기해 놓고 정작 나는 아직 놀란의 《The Odyssey》를 극장에서 보지 못했다. 영화가 벌써 10억 달러를 훌쩍 넘겼다는데, 이쯤 되면 나도 확인하러 가야 할 것 같다.
다만 사이렌이 등장한다고 해서 귀에 밀랍을 넣거나 극장 의자에 몸을 묶을 필요까지는 없으리라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