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명 총장(캘리포니아 프레스티지 대학교).
(Photo : ) 이상명 총장(캘리포니아 프레스티지 대학교).

MBTI 유형을 외우고, 애착 유형 검사를 받고, 상담실 소파에서 수백 시간을 보낸 사람이 있다. 자신에 대한 심리학적 데이터는 누구보다 많이 쌓았다. 그런데 정작 그는 그 질문 앞에서 더 막막해진다. “그래서 나는 누구입니까.” 그 어느 세대보다 많이 ‘아는’ 시대에,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자기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고백한다. 데이터는 넘치는데 정작 나는 없는 이 역설이 우리 시대 인간 이해의 민낯이다.

덕 윤리와 서사신학으로 잘 알려진 미국 신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는 이 역설의 뿌리를 짚는다. 인간을 ‘합리적 개인’, 곧 보편 원리로 선악을 가리는 존재로 보는 계몽주의 그림이 애초에 틀렸다는 것이다. 인간은 원리가 아니라 ‘이야기’로 산다. 우리는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가족과 민족, 신앙 공동체의 이야기 속에 던져진다. ‘성품’도 원칙 암기가 아니라, 그 서사를 오랜 시간 함께 살아내는 공동체 안에서 빚어진다. 그래서 교회는 개인의 결단을 돕는 보조 기관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사회 윤리’다.

바로 이 지점에서 현대 심리학의 한계가 드러난다. 심리학은 대체로 인간의 고통과 정체성을 감정 구조나 인지 패턴, 트라우마의 회로 같은 내면 문제로 설명한다. 실질적 도움을 부정할 수 없지만, 사회학자 필립 리프가 명명한 이러한 ‘치료적’ 인간관을 하우어워스는 이어받아, 인간을 서사와 공동체로부터 떼어내 부품처럼 진단·수리할 자족적 체계로 축소시킨다고 본다. 상실의 슬픔도 상담 기법만으로 풀리지 않는다. 부활의 소망을 함께 고백하는 회중 앞에서 비로소 그 의미를 찾는다. 개인을 내면으로 환원하는 순간, “누구의 이야기 속에, 누구와 함께”라는 질문이 사라진다.

성서 자체가 이 문법을 실증한다. 신명기 26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첫 소산을 드릴 때 함께 암송해야 할 신앙고백을 명시한다. “내 조상은 유리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애굽에 내려가 그곳에서 소수로 거류하였더니 거기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고…우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나이다”(신 26:5-9). 구약학자 폰 라트(Gerhard von Rad)가 지적했듯, 이 짧은 역사적 신조는 이스라엘 신앙의 가장 오래된 뼈대다. 주목할 것은 이것이 추상적 교리 진술이 아니라 조상의 유랑과 부르짖음과 구원을 예배 공동체가 함께 소리 내어 반복하는 1인칭 서사라는 점이다. 이스라엘은 자신을 심리 상태나 민족적 본질로 정의하지 않는다. 해마다 자신이 누구의 이야기 안에 있는지를 공동체 앞에서 다시 말함으로써 정체성을 갱신할 뿐이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전체가 이 문법을 따른다. 성경은 논증집이 아니라 이야기다.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스라엘을 광야로 이끄시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완성되는 하나의 서사이며, 우리는 그 이야기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배운다. 바울도 빌립보 교회에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 이야기를 먼저 들려준 뒤에야 “이 마음을 품으라”고 권한다(빌 2:5-11). 이야기가 먼저고, 그 이야기를 함께 예배하는 공동체 안에서 성품이 자란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하우어워스의 서사 공동체론은 본래 미국 교회와 장애인 돌봄 공동체의 경험에서 다져졌지만, 디아스포라 정체성이라는 렌즈를 통과할 때 그 통찰은 한층 더 날카로워진다. 디아스포라야말로 ‘서사 없이는 존속할 수 없는’ 인간 실존의 극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국가도 영토도, 심지어 모국어의 일상적 사용조차 보장되지 않는 흩어진 백성에게 남는 것은 오직 함께 기억하고 함께 낭송하는 이야기뿐이다. 신명기 26장의 신앙고백이 바로 그 원형이다. 그것은 유랑민이 자신의 유랑을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서사로 다시 읽어내는 예전적 장치였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의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는 심리학적 자기 진단이 결코 줄 수 없는 것, 곧 흩어짐 자체를 은혜의 서사로 재해석해 주는 공동체적 문법을 이미 상속받고 있는 셈이다.

주일마다 드리는 예배, 함께 나누는 성찬, 그리고 추수감사절마다 이민 1세대가 태평양을 건너온 사연을 손주 세대 앞에서 다시 들려주는 간증의 시간—이 하나하나가 신명기 26장의 신앙고백을 오늘 다시 반복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 서사적 실천이 사라질 때, 디아스포라 교회는 이민 사회학이나 문화 적응 이론으로 환원될 위험에 노출된다. 그러나 이야기 안에서 우리는 각자의 이민사, 상실, 재정착의 역사를 우연이 아닌 은혜의 서사로 다시 읽는다.

결국 자신을 안다는 것은 데이터를 쌓는 일이 아니라, 어떤 이야기에 속해 누구와 함께 살아가느냐의 문제다. 진단은 홀로 받을 수 있지만, 이야기는 홀로 간직할 수 없다. 데이터는 많아도 이야기와 공동체 없이는 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