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곧 3·1절 107주년을 맞는다. 미주와 유럽, 아시아 곳곳의 해외 한인 사회에서 한반도의 분단 현실을 성찰하는 6일간의 릴레이 금식기도가 조용히 이어지고 있다. 이 기도에는 구호도, 정치적 주장도 없다. 그러나 오늘의 디아스포라에게 던지는 질문만큼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래도 회개할 기회를 얻은 것이 감사할 뿐이다. "우리는 무엇을, 그리고 누구의 죄를 회개해야 하는가."
해외에 살아가는 우리는 종종 이렇게 말한다. 분단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었고, 과거의 비극은 조상들의 몫이었다고. 그러나 성경은 역사를 그렇게 단절해 정리할 수 없다고 증언한다.
바벨론 포로로 살아가던 '다니엘'은 자신의 경건이나 무고함을 변호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담담히 고백한다. "우리는 범죄하였고 패역하였으며... 주의 종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나이다."(단9:4 이하) 이 기도에서 '우리'는 다니엘 개인의 죄를 넘어 조상 대대로 이어진 공동체의 배반 전체를 포함한다. 그는 타인의 죄를 역사적 설명으로 남기지 않고, 자신의 현재적 책임으로 끌어안았다.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이끈 느헤미야 역시 마찬가지다. 페르시아 왕궁이라는 안전한 자리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 주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느 1:6 이하) 이 고백에는 분명한 신학적 전제가 있다. 공동체의 죄는 시간이 흘렀다고 소멸되지 않으며, 회개되지 않은 역사는 다음 세대의 책임이 된다는 인식이다.
오늘의 해외 디아스포라는 이 두 인물과 놀라울 만큼 닮은 자리에 서 있다. 우리는 분단을 결정한 세대는 아닐지라도, 그 결과 위에서 자유와 이동, 안전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이 역사 앞에서 관찰자인가, 아니면 중보자인가.
필자 역시 전통적인 장로교 배경에서 출발해 미국 임상목회교육과 병원 원목 사역을 거치고, 현재는 북한 동족과 탈북민을 섬기는 디아스포라 현장에서 사역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나는 다니엘과 느헤미야의 기도가 개인의 경건을 넘어, 갈등과 상처로 얽힌 공동체의 죄를 대신 끌어안는 중보의 실천임을 몸으로 배워왔다.
선교 현장은 늘 이상적이지 않다. 세대 차이, 문화 차이, 기질과 성격의 차이가 같은 사명을 가진 이들 사이에서도 깊은 상처와 오해를 남긴다. 그러나 중보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자신의 책임이 아닌 죄까지도 하나님 앞에 대신 들고 서는 태도 말이다.
이번 릴레이 금식기도가 의미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 기도는 누군가를 향한 비난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디에 서 있는가"를 묻는다. 이념이나 거짓의 힘이 아니라, 인내와 용서, 회개의 자리에서 역사를 다시 바라보게 한다.
3·1운동이 남긴 가장 깊은 유산은 독립이라는 결과 이전에 "우리는 누구인가?"를 묻는 양심의 질문이었다. 107년이 지난 지금, 해외 동포사회의 조용한 금식과 기도는 그 질문을 다시 오늘의 언어로 되살리고 있다.
분단을 끝내는 힘은 언젠가의 협상 테이블이나 선언 이전에,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역사 앞에서 어떤 태도로 서느냐에서 시작될지도 모른다. 다니엘처럼, 느헤미야처럼, 자신의 죄가 아닌 죄까지도 자기 것으로 동일시하는 중보의 자리에서 말이다.
"주여, 수욕이 우리에게 돌아오고 우리의 왕들과 방백들과 조상들에게 돌아온 것은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음이니이다. 주 우리 하나님께는 긍휼과 사하심이 있사오니..."(단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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