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글에서는 20여년전의 비전 50 선교회가 만주벌판에서 진행한 사역을 중심으로 사역의 출발을 나누었다. 이와같이 우리들의 사역이 활발하게 전개되는 중에 엘샤다이의 선교전략가이신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일을 행하셨다.
그것은 비전 50과 동역을 하던 조선족, 한족 목회자들이 중국 곳곳으로 - 허드슨 테일러의 “China Inland Mission (중국 내지선교회)”와 같이 내지 선교사가 되어 중국 서쪽의 성도 Chéngdū, 충칭Chóngqìng, 시닝 Xīníng 과 중국의 남쪽의 난닝 Nánníng, 귀양 Guìyáng, 계림Guìlín, 쿤밍 Kūnmíng, 심지어 최고 남단의 해남도 Hǎinán 까지 흩어져 복음을 전하는 역사가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아는대로 중국교회는 지하 가정교회를 중심으로 1920년대 부터 ‘백투 예루살렘’을 비전으로 삼고 나아가고 있었다. 혹자는 이를 신학적으로 과장된 중국 민족주의 운동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100년 전부터 중국의 지하 가정교회는 하나님의 세계선교 완성에 동참하는 비전을 공산주의 치하의 고난중에도 멈추지 않고 성실히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한 비전의 근본이 있기에 비전 50의 세계선교의 비전을 나누었더니, 중국의 한족 목회자들도 우리들과 동역자가 되는 것을 죽마고우를 만나듯 반가워하였다. 또한 열정적인 비전 50의 동역자들이 되었다. 그리하여 비전 50 선교는 중국의 곳곳의 중요도시에 많은 목회자들이 동역하는 그룹들로 탄생이 되어졌다.
필자 교회의 지난날을 회고해 본다면 이러한 놀라운 하나님의 선교의 확산은 우리들이 크나큰 고난과 변화의 시점 한 중간에 놓여있었던 시기였다. 2005년도에 새예배당 건축이 시작되었고, 2008년에 입당하기전인 2007년에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쳐서 너무나 힘겨운 시기였다. 우리 자신의 문제를 돌아보기에도 압박이 큰 시점임에도 필자의 교회는 단기선교팀을 해마다 파송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급기야 2008년 7월 14일에는 비전 50 중국 선교회가 형성되어 1차 비전 50 선교사대회가 광시성 난닝에서 출발되었다. 우리들이 엄청난 난관중에도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포기하지 않은 결과, 경제적 위기가 가득한 위기의 시기에 하나님께서는 2008년을 비전 50 역사에 새로운 패러다임 시프트의 원년으로 삼아주셨다. 이후 비전 50 중국선교회는 2010년 귀주성 귀양에서 다시 열렸고, 교회는 비전 50 중국선교회를 지원하기 위해 단기선교팀을 해마다 중국에 파송하였다.
또한 필자가 몸담았던 교회는 2011년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비전 50 선교운동의 최초 멘토가 되는 윤일흠 목사님의 은퇴였다. 그리고 부목사였던 필자가 담임목사로 섬기게 되었다. 이러한 리더쉽의 변화속에서도 필자의 교회는 비전 50 선교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현실은 냉혹하였다. 2008년 초에 새예배당에 입당을 하였지만, 건축으로 인한 재정적 후폭풍이 교회에 몰려오기 시작하였다. 교회 경상비에 많은 압박이 생겼다. 결국 많은 스탭들의 페이 데이가 한 두주씩 늦어지기 시작하였다. 교회의 살림살이가 어려워지니 교회 내부의 활동들은 위축이 되었다. 많은 교회 구성원들이 교회를 위해 사용한 것들을 교회에 청구하지 않고 자신들의 지갑을 열어 지불하였다. 필자 역시 자비량 원칙의 선교였기에 크레딧 카드는 신용불량이 될 수 있는 정점을 찍고 있던 시기였다.
이러한 위기의 시간에 교회는 내부적으로 진정한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로 거듭나는 산통을 경험하게 되었다. 교회 내부의 여름성경학교, 수련회, 야유회 등등, 교회 내부 행사에 대한 예산 지원이 미미하기에 많은 임원들이 선교를 멈추고 교회 내부 살림 살이에 집중할 것을 요청하였다. 당시 필자는 건축을 위한 모기지를 갚느라, 규모가 많이 확장된 건축뒤에 각종 고정비용과 관리 비용의 엄청난 상승 등으로 인하여 고생을 하고 있는 성도들을 보며 마음이 무척 아팠다. “오죽하면 선교비 지출을 중지하자는 요청을 하였을까...?”하며 마음이 괴로왔다. 하지만 우리가 당시에 후원하던 많은 현지인 내지 선교사들은 $300로 한 달 생활을 할때였기에 당장이라도 후원을 중단하면 중국 변방의 내지에서 생존이 불가능할 것이 훤히 보였다.
그래서 힘겨워 하는 성도들에게 필자는 아픈 말을 하며 뒤로 물러설 수가 없었다. 필자는 성도들에게 호소했다. “여러분, 교회는 멤버쉽 클럽 하우스가 아닙니다. 내가 기부한 돈으로 친교하기 위해 모인 곳이 아닙니다. 때로 나는 불편하더라도, 때로 나는 굶더라도, 죽어가는 영혼을 살려내야만 하는 구조대입니다” 이 대답으로 인해 필자는 많은 원성(?)을 들으며 힘겨운 시간을 버텨내어야 했다. 그러나 그 이후 비전 50 중국 본부는 중국 전역에서 한족, 조선족 목회자들의 큰 부흥을 경험하게 이끌어 주었다. 그리하여 2012년 3차 비전 50 선교사대회가 장수성 수첸에서, 2013년 4차 비전 50 선교사대회가 베이징에서, 2014년 5차 비전 50 선교사대회가 윈난성 쿤밍에서 점점 더 부흥되고, 조직화된 모습으로 중국 전역으로 번져나가게 되었다.
이후 14년이 지난 지금 당시에 원망(?)하였던 분들이 오히려 비전 50 선교에 핵심 멤버들이 되어 동역하고 있으니 얼마나 복을 많이 받은 목사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통과하는 고난의 시간은 우리에게 패러다임 시프트를 완성하는 뫼비우스 띠의 제일 끝단이 이어지는 미라클의 시간이 될 수가 있음을 확신하고 또 확신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