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조셉 마테라 목사의 기고글인 '내가 중지론자가 아닌 10가지 이유'(10 reasons why I am not a cessationist)를 28일 게재했다.
마테라 목사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작가이자 컨설턴트, 신학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미국 사도 지도자 연합(The U.S. Coalition of Apostolic Leaders), 그리스도 언약 연합(Christ Covenant Coalition) 등 여러 단체를 이끌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중지론자(cessationist), 즉 예언·방언·치유와 같은 성령의 은사가 사도 시대 이후 중단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가장 자주 인용하는 본문 중 하나가 고린도전서 13장 8-12절이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나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중지론자들은 여기서 말하는 "온전한 것(the perfect)"을 성경 정경의 완성이라고 해석하며, 신약 성경이 완성된 이후에는 예언이나 방언 같은 은사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물론, "지식도 폐하리라"는 부분은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이들의 주장이 스스로 붕괴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또한 야고보서 1장 23-25절이나 시편 19편 7절을 인용해 자신들의 해석을 뒷받침한다.
처음 들으면 그럴듯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성경, 교회 역사, 그리고 오늘날 전 세계 교회의 증언을 깊이 살펴보면 전혀 다른 그림이 보인다. 내가 중지론자가 아닌 이유 10가지는 다음과 같다.
1. 성경은 이미 정경 완성 전에도 '온전하다'고 불렸다
야고보서와 시편 19편은 신약 정경이 완성되기 훨씬 전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하다'고 묘사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바울이 말한 "온전한 것"은 완성된 신약 성경을 의미하지 않는다. 바울이 가리킨 것은 그리스도의 영광 안에서 주님과 얼굴을 맞대는 온전한 만남이다.
2. 바울은 '그리스도를 얼굴과 얼굴로 마주 보는 것'을 말했다
"그 때에는 내가 온전히 알리라"는 바울의 표현은 철저히 종말론적 언어다. 이는 우리가 영광 중에 영화롭게 되어 주님을 직접 대면하는 순간에만 성취된다(참고: 요한일서 3:2). 바울은 자신이 죽기 전 성경이 완성될 것을 말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상태에서의 완전한 앎을 가리킨 것이다.
3. '온전한 앎'은 아직 오지 않았다
만약 "온전한 것"이 성경의 완성이라면, 교회는 지금 완전한 앎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거울로 희미하게 보는" 수준에 있다. 성경을 완벽히 연구해도 완전한 지식에 도달했다고 주장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교회는 여전히 성령의 은사를 통해 세워져야 한다.
4. 역사적 주석가들은 중지론 해석을 지지하지 않았다
20세기 이전에는 "온전한 것"을 성경 정경의 완성이라고 해석한 주요 주석가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 중지론자들이 자주 인용하는 종교개혁자 **칼뱅(John Calvin)**조차도, 고린도전서 13장은 성도의 영화로운 최종 상태를 가리킨다고 보았다.
5. 교회 역사 속에는 기적과 은사가 계속되었다
은사가 사도 시대 이후 사라졌다는 주장은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는다. 교회 역사 속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수없이 등장한다.
2세기 유스티누스 순교자(Justin Martyr)와 이레네우스(Irenaeus)는 계속되는 은사와 치유를 기록했다. 터툴리안(Tertullian)은 북아프리카 교회에서 일어난 예언과 영적 체험을 자세히 묘사했다.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니사의 그레고리우스(Gregory of Nyssa) 등 초기 교부들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을 증언했다. 어거스틴(Augustine)은 처음에는 기적을 의심했지만, 훗날 *하나님의 도성(City of God)*에서 자신의 시대에도 치유와 축사 사건이 있었다고 고백했다.
사막 교부들, 모라비안 형제단, 초기 감리교 운동, 그리고 20세기의 오순절 운동까지, 성령의 역사는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6. 중지론은 초자연적 믿음을 이성주의로 대체했다
현대 중지론의 뿌리는 계몽주의적 이성주의에 있다. 인간의 이성을 초자연적 경험보다 우위에 두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중지론자들이 "하나님이 마음에 평안을 주셨다"거나 "하나님이 이 길로 인도하셨다"는 식의 주관적인 언어를 여전히 사용한다.
성령께서 우리의 구원 확신을 우리의 영과 함께 증언하신다(로마서 8:16)면, 왜 성령이 성경에 일치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여전히 인도하고 말씀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하는가?
7. 복음에는 여전히 표적과 기사가 따른다
중지론자들은 히브리서 2장 3-4절을 인용해 표적이 사도 시대에만 복음을 확증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본문은 서술적이지, 규범적이지 않다. 오늘날에도 미전도 지역이나 선교지에서는 복음이 전해지기 전에 환상, 치유, 귀신 추방 같은 초자연적 역사들이 자주 보고된다. 하나님은 여전히 그분의 말씀을 능력으로 확증하신다.
8. 히브리서 1:1-2는 '이제 하나님은 말씀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중지론자들은 히브리서 1:1-2를 인용하며, 하나님이 이제는 성경을 통해서만 말씀하신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본문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완결성을 강조하는 것이지, 성령의 음성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다.
사도행전과 서신서 전반에서, 성령은 계속해서 교회를 인도하고 경고하고 가르친다. 성경 어디에도 이러한 사역이 중단될 것이라는 구절은 없다.
9. 교회는 여전히 은사를 필요로 한다
오순절 성령강림의 능력으로 사역하던 초대 교회조차 은사를 필요로 했다면, 오늘날의 교회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사도행전 2장 17절은 이렇게 선언한다: "마지막 날에 ... 너희의 아들딸들은 예언할 것이요." "마지막 날"은 교회 시대가 시작되면서 이미 시작되었다. 은사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필수 도구다.
10. 세계 교회의 성장과 성령의 능력
오늘날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교회는 오순절·은사주의 교회다.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아시아, 심지어 중동 이슬람권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치유와 예언, 귀신 추방과 같은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고 있다.
이 확산은 역사상 가장 거대한 선교 운동 중 하나로 이어졌다. 복음 전파와 함께 표적과 기사가 동반되며, 수많은 영혼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고 있다. 만약 이것이 사탄의 역사라면, 사탄이 스스로 자기 나라를 무너뜨리는 꼴이 될 것이다. 현실은 그 반대다. 성령의 역사로 인해 수백만 명이 예수께 돌아오고 있다.
결론
중지론은 성경 본문을 단편적으로 해석하고, 교회 역사와 전 세계 성령의 증언을 무시한 서구 합리주의의 산물이다. 성령의 은사는 고대의 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도 복음 사역을 위해 필요한 하나님의 도구다. 아직도 불신의 어둠이 짙게 드리운 세상 속에서, 교회는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무장해야 한다(요한복음 14:12).
무력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거부하자. 말씀과 성령을 함께 붙들자. 그리고 하나님께서 여전히 교회에 부어주시는 모든 은사로 무장하여, 담대하게 하나님의 선교 사명에 동참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