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인의 첫번째 덕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겸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두번째 덕이 뭐냐고 물었을 때도 겸손이라고 말했습니다. 세번째 덕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도 겸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어느 분의 말씀 처럼 겸손은 자기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장은 바리새인들을 바라 보시면서 우리 주님께서 경건의 모양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하는 아주 경건의 흉내를 내면 이런 증상들이 나타난다…라고 말씀해 주시는 내용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구체적으로 자세하게 백성들이 알아 듣기 쉽게 말씀하시는지 참으로 우리 주님은 이야기의 달인이십니다.

*2절 -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는 말은 보통 회당에 가면 바리새인들 중에서 가장 권위 있는 사람이 앉는 돌로 만든 의자가 있습니다. 뭐 요즘 말로 하면 대학교에서 가장 권위 있는 교수에게 주는 석좌교수라는 자리가 있습니다. 돌로 만든 자리는 아니지만 그런 자리를 주는 경우가 있지요.

제가 어려서 다녔던 교회의 모습이 생각이 납니다. 강대상 뒤에 나무로 만든 등받이가 길고 큰 정말로 권위의 상징인 그런 의자들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거룩한 모습으로 성경을 꼭 왼쪽 겨드랑이 밑으로 손으로 끼워서 잡고 천천히 걸어 나오셔서 그 의자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온 성도들이 보는 앞에서 예배 전에 기도를 하십니다. 어릴 때는 그 모습이 얼마나 보기 좋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과연 그렇게 거룩하고 경건해 보이는 모습일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너무 권위주의적인 모습은 아닌가…싶습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말합니다. 권위주의가 왜 문제가 되는가…그것은 그 자리가 마치 모세의 권위를 대신한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 자리에 앉으면 목에 힘이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이 3절과 4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3절 -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4절 -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가르침은 받되 행동은 본 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은 말만 하고 행동은 안 하기 때문이다. 또 백성들에게는 지키지도 율법의 조항들을 만들어서 짐을 만들어서 지우고 자기는 하나도 지키지 않는다.

이 부분에서 도전을 받아야 할 점은 바로 지도자의 언행일치입니다. 정말로 어려운 부분이지만, 날마다 자신에게 물어 보아야 할 질문입니다. 아마도 가장 지켜내기가 어려운 부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목사도 설교하는 대로 살아야 하는데 그게 늘 고민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아주 사소한 규칙과 예법을 만들어서 지키도록 가르쳤다고 합니다. 율법의 생활 규범이라는 것이 있는데 육백 가지가 넘는 조항으로 세분화 시켜서 백성들의 생활 전반에 적용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주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들이 그런 육백 가지가 넘는 세부 조항들을 만들어서 백성들을 괴롭게 해 놓고 너희들은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필요할 때에 아주 작은 자비조차도 베풀지 않는다…그런 야단을 치고 계신 겁니다.

*5절 -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신약 성경 가운데 경문이라는 말은 이곳에서만 나옵니다. 이 경문이 무엇인가하면, 율법서의 네 부분을 써 넣은 가죽 상자입니다. 율법의 네 부분…출애굽기 13:2 – 10, 출 13:11-16, 신 6:8, 11:18…이 네 가지 부분의 말씀을 기록한 가죽입니다. 쉽게 말하면 호신패…왜 옛날에 암행어사가 못된 사또 앞에 나타날 때 멋있게 들어 보이는 어사패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같은 겁니다.

이 호신패가 어디서 유래가 되었을까…신명기 6장 8절의 말씀을 보면. ( 신6:8 )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포로생활을 마치고 돌아와서 율법을 기억하면서 살겠다고 하는 다짐으로 마치 우리가 큐티를 하듯이 경건 생활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옷에다가 율법을 적어서 차고 다닌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한국 분들도 이런 것을 많이 합니다. 어느 집에 가보면 거실에도 말씀이 붙어있고, 침대 머리 맡에도, 화장실 휴지 말이 옆에도, 차를 타면 대쉬보드 위에도, 말씀이 붙어 있는 것을 봅니다. 그것도 신명기 6장 8절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실천하는 행동이겠지요…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 경문을 몸에 차고 다니는 것이 그 목적이 바로 사람에게 보이고자 차고 다니는 경문 사이즈도 큰 것으로 만들어서 다녔다는 말입니다. 옷술도 큰 것으로 했다…옷술은 겉옷 그러니까 외투 같은 옷의 네 귀퉁이에다가 달아 놓은 술…그러니까 영어로 하면 Tassel…늘어뜨리는 실로 만든 줄 같은 것 있지 않습니까…그런 것을 아주 큰 것으로 해서 달고 다니는 겁니다.

졸업식 때 사각모에 다는 실로 된 그…술…같은 것입니다. 가운을 입고 앞으로 늘어뜨리는 띠 같은 것의 밑에다가 다는 장식품을 말합니다. 문제는 그런 것들을 크게 하면 할수록 권위 있게 보인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경건의 모양의 극치가 아닐까요? 역시 무엇이든지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자 할 때에 멋있어 집니다. 신경을 쓰게 됩니다. 크게 합니다. 권위적이 됩니다. 어쩔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경건의 모양을 나타내는데 당연히 상석에 앉지요…회당에서도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겠지요…시장에 나가면 사람들에게 문안 인사를 받는 일이 당연하겠지요.

그런데, 우리 주님의 도전은 어느 자리이든지…자신의 자리를 마치 하나님 보다 높은 것인 줄 착각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가장 홀로 위에 계셔야 할 분은 오직 한 분…우리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라는 말씀입니다.

( 약4:6 )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