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종근 목사의 저서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는 1896년 남장로교 선교사로 조선에 파송되어 전주와 군산 그리고 목포를 비롯한 호남지역에서 평생을 보내며 이 지역의 유무형의 선교 인프라를 깔아 호남선교의 토대를 마련한 하위렴 선교사의 선교 일대기를 수회에 나누어 본지에 싣기로 한다.

구암(궁말)교회 당회장으로

하위렴이 군산에 부임했을 때 가장 시급했던 사역 가운데 하나가 스테이션 내의 구암교회를 돌보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구암교회는 군산지부의 위상을 드러내는 교회일 뿐만 아니라 호남 최초의 모 교회라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는 교회였기 때문이었다.

대체적으로 교회는 잘 운용되고 있었다. 주일학교도 잘 조직이 되어 나름 효율적으로 진행되고 있었고, 사랑채에서 열렸던 수요 저녁 예배와 주일 저녁 예배는 참석자가 많아지면서 본당으로 옮겨 예배를 드렸다.

부임하면서부터 교회 생활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헌금의 필요성과 용도를 가르치고, 교역자 사례와 활동비는 물론 비록 적은 액수일지라도 신학생까지도 후원할 수 있게 함으로써 개교회를 넘어 공교회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지도 가르쳐 알게 했다.

놀랍게도 교인들은 능력에 비해 헌금에 인색하지 않았으며 교회의 경상비 지출에 교역자 사례와 장로교 공의회 총대 왕복 여비는 물론 신학생 후원 기금과 심지어 교회 묘지 매입 경비까지도 다 포함하고 있었다.(각주 1)

부임하던 해(1904) 그는 14명을 학습 교인으로 받았고 6명에게 세례를 베풀었으나 부임한 지 2년이 지나자 주일 평균 출석 교인이 150명을 넘어서면서 주일학교도 100명이 넘게 모였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해가자 아이러니하게도 사회적으로는 서구 기독교에 대한 수용성이 크게 고조되는 현상이 일었다. 그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구암교회만 해도 1907~8년 어간에 31명에게 세례를 줄 정도로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고 있었다.

교인들이 늘어감에 따라 평신도 지도력의 필요를 느낀 하위렴은 그동안 전킨을 도와 헌신적으로 섬기며 교인들의 신뢰를 받아오던 오인묵을 장로로 피택하기도 했다. 마침 알렉산더 선교사의 주선으로 미국에 유학을 떠났던 오인묵 장로의 아들 오긍선이 남장로교 선교사로 다시 돌아와 다니엘과 함께 의료 사역을 하던 때도 이 무렵이었다.

순회전도 사역

하위렴이 순회했던 동부 시찰은 대략 52Km² 면적의 평야 지대로 인구 밀집 지대였는데(각주 2), 임피를 포함한 옥구군의 동부와 용안, 웅포, 함라, 오산, 황등, 성당면을 포함한 익산군 그리고 김제군의 일부 지역까지였다. 이 지역에서의 교회 성장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 증가세가 해마다 기록적이었다.

1904년 군산에 부임할 때 지부에 이미 8개의 공동체가 있었으나 1906년에는 11개 교회로, 1907년에는 15개로 늘어나더니 1908년에는 비약적으로 증가해 30개에 이르고 있었다.(각주 3)

1906년 19명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102명을 학습 교인으로 받았으며, 그 이듬해 1907년에는 108명에게 세례를, 그리고 236명을 학습 교인으로 받았다. 그뿐 아니라 2개의 교회에서 각기 한 명씩의 장로를 세웠으며, 그 외에도 대여섯 명의 제직을 피택해 놓은 상태였다.(각주 4) 잘 조직된 주일학교가 4개 교회에서 운영되고 있었고, 그런대로 성공적이다 싶은 주일학교도 대여섯 곳이나 되었다.

1906년에 11개 교회 중 6개 교회가 건물을 매입하거나 기존의 건물을 개수했고, 또 한 곳은 증축을 마쳤는데 그 이듬해인 1907년에 들어서자 시찰 지역 내 15개 교회 중 12개 교회가 이미 자체 예배당을 갖추고 있었으며(각주 5) 교회 부설학교 역시 2개에서 6개로 증가하고 있었다.(각주 6)

한편 교역자 사례는 물론 성서공회 같은 곳에 내는 분담금에 대해서도 교인들의 이해가 깊어지면서 참여에 긍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7개 교회가 성서공회에 헌금을 보냈으며, 한 교회는 적은 액수지만 기근을 겪는 중국에 선교비를 보내기도 했다. 선교지를 돕고 기관들을 후원하는 것이 그들에게 적지 않은 부담이 될 수도 있었지만, 하위렴은 더 나아가 무보수로 봉사하는 전도 부인까지도 도울 수 있도록 독려하기도 했다.(각주 7)

한 달 혹은 달포 정도에 한 번씩 설교일정표를 미리 만들어 관할 시찰의 모든 교회에 돌리고 조사들에게 순회 일정을 통보했으며, 주일마다 인도자를 지정해 주고 교회를 교대로 돌아가며 인도하도록 했다. 순회 일정은 일 년에 적으면 2회, 많으면 4회 정도로 조정하고, 약간의 연조年條가 있는 교회를 순회할 때면 으레 성찬을 베풀기도 했다.(각주 8)

하위렴 선교사는 순회사역 중 만난 인물과 그들의 신앙과 활동 그리고 그들에게 들었던 소소한 이야기까지도 놓치지 않고 항상 메모해두었다가 나중에 생생한 기억으로 이야기들을 풀어내곤 했다.

자신의 순회를 돕던 김옥여, 김윤천, 이성춘, 양응칠 등 조사들의 활동은 물론 생후 2주 된 아기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 전도부인 정 씨를 언급하면서 '자신이 순회 사역을 하는 동안 그녀처럼 준비된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각주 9) 고 회고하는 한편 그는 교인들의 헌신적인 노력에 걸맞지 않은 일부 교인들의 부끄러운 모습도 기록으로 남겨 초기 교회와 교인들의 솔직한 단면을 엿볼 수 있게 했다.

"한번은 한 회의에서 강매될 처지에 있는 교회를 돕자는 안건을 놓고 오랫동안 협상을 했으나 해결된 기미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임의 리더 한 사람에게 이 문제를 놓고 기도회를 인도하도록 맡겼는데 그는 (과거부터) 폭주가로 술을 마시면 난폭해지던 사람이었다. 당연히 기도회는 무산되고 말았다. (교인들은) 완고한 죄인이 기도회를 인도하고 있다는 것은 아예 염두에 두지도 않고 단지 교회가 넘어가게 생겼다는 것에만 안타까워하면서 "내주의 나라와 주 계신 성전과 피 흘려 사신교회를 늘 사랑합니다"라는 찬송가만 감격 어린 곡조로 부르고 있었다."(각주 10)

스테이션을 궁말로 이전하고 나서 하위렴 선교사가 순회하는 동부 시찰에 함라교회(1904)를 비롯해 동련교회(1905), 개복교회(1905)(각주 11), 고현교회(1906), 제석교회(1906), 송산리교회(1906), 웅포교회(1906), 함열교회(1907) 등이 잇따라 세워지고 있었다.

• 개복교회

군산교회가 궁말로 이전할 때(1899) 함께 옮겨갈 수 없었던 교인들이 하위렴의 지도로 조사이자 매서인으로 활약하던 최흥서와 함께 개복교회(1905)라는 이름으로 공동체를 열면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마침 홍종익, 홍종필 형제(각주 12)가 군산으로 이사와 복음을 듣고 개복교회에 합류한 시기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개복교회는 두 형제의 활약에 힘입어 그 이듬해인 1906년 새 성전을 지어 봉헌하며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 동련교회

1901년 백낙규, 송군선 등 몇 사람이 장평리에 기도처를 세웠는데(각주 13) 1904년 군산지부 조사들의 보고로 하위렴 선교사가 이곳을 방문하면서 동련교회가 수면 위로 떠 오르기 시작했다. 그해 가을, 모임을 이끌던 백낙규가 하위렴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궁말과 남차문교회에서 온 조사가 장평리를 일년내 자주 방문했다. 내가 오월에 그곳에 방문했을 때 마침 믿음을 고백하기 위해 기독교에 대해 읽고 생각하고 있던 어떤 한 사람(각주 14)을 위해 때가 온 것 같았다. 그 이후로 참석자들과 그들이 시작하고 있다는 학교에 대한 고무적인 보고가 반복적으로 올라오고 있었다."(각주 15)

하위렴 선교사는 1905년 독노회에 동련교회 설립을 보고했으며, 2년 뒤인 1907년에는 용산리에서부터 출석하는 박공업과 몇몇 교인들을 떼어내 용산교회를 분립시켰다.(각주 16) 동련교회는 그때까지 장로가 세워지지 않아 조직교회가 되기 전이었는데 마침 몇 사람이 감리교회에서 옮겨오면서 교회가 크게 고무되기도 했다.

한편 하위렴은 동연리(?)(각주 17) 에서 겪었던 일화 등을 전하면서 복음으로 거듭나 변화된 자의 삶을 소개하기도 했다.

"마을에서 주점을 하던 고 씨 노인은 코끝이 빨갛게 되지 않으면 몸을 움츠리고 다닐 정도로 술독에 빠져 지내는 자였는데 예수를 믿은 뒤로는 주변 친구들이 (완전히 변화된) 그를 보고 정신 나간 친구라고 조롱할 정도로 그는 그 마을에서 복음 그 자체가 되었다."(각주 18)

각주
1. Rev. W. B. Harrison, "New Hopes in a New field", The Korea Mission Field, Vol. 2, No. 2, Dec. 1905, pp. 27
2. William B. Harrison, "Chulla Do Circuit", The Korea Mission Field, Vol. 2, No. 8. Jun. 1906, pp. 145
3. 송현강, "윌리엄 해리슨(William B. Harrison)의 한국선교",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37호, 2012. 09, pp. 48
4. William B. Harrison, "Evangelistic Work in Chulla Circuit", The Korea Mission Field, Vol. 3, No. 8, Aug. 1907, pp. 125
5. William B. Harrison, "Semi-Annual Examination near Kunsan", The Korea Mission Field, Vol. 3, No. 1, Jan. 1907, pp. 7
6. 안락(安樂)소학교/전북 임피군(군산) 서사면 구암리/구암교회
영원(永願)학교/전북 임피군(군산) 하북면 포동/
부용(芙容)학교/전북 함열군 북일면 상제석/제석교회
계동(啓東)학교/전북 함열군 남일면 동연동/동련교회
도남(道南)학교/전북 익산군 남이면 남참리/남전교회
영신(永新)학교/전북 용안군 남면 송산동/송산교회
7. William B. Harrison, "Evangelistic Work in Chulla Circuit", The Korea Mission Field, Vol. 3, No. 8. Aug. 1907, pp. 126
8. 위의 책, pp. 125
9. 위의 책, pp. 125-126
10. William B. Harrison, "Evangelistic Work in Chulla Circuit", The Korea Mission Field, Vol. 3, No. 8. Aug. 1907, pp. 126
11. 1905년 개복교회라는 이름으로 시작했지만, 군산교회가 갈라져 구암교회와 개복교회가 되었기 때문에 누가 먼저라고 다투는 일은 의미가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2. 1911년 홍종익이 1912년에는 홍종필이 장로로 장립이 되었다. 후에 홍종필은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1923년 목사 안수를 받고 개복교회의 목사로서 사역했으며 1924년 총회 부서기로, 1927~9 3년 간 총회 서기를 거쳐 1930년에는 총회장으로 피선되어 호남지역에서 김필수, 이기풍, 이자익 목사에 이어 네 번째로 장로교 총회장이 되었다. 총회장으로 피선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43세였다.
13. 연규홍, "예수꾼의 뚝심", 동련교회 90년사, 동련교회 역사편찬위원회, 1992, pp. 276
14. 동련교회라는 이름으로 시작되기 전에, 장평리 기도 모임을 이끌던 백낙규로 추정.
15. Rev. W. B. Harrison, "New Hopes in a New field", The Korea Mission Field, Vol. 2, No. 2, Dec. 1905, pp. 28
16. 연규홍, "예수꾼의 뚝심", 동련교회 90년사, 동련교회 역사편찬위원회, 1992, pp. 276
17. William B. Harrison, "Semi-Annual Examination near Kunsan", The Korea Mission Field, Vol. 3, No. 1, Jan. 1907, pp. 7-8 (하위렴의 동부 시찰에 속하지 않은 삼기면 용연리에는 교회가 없었기 때문에 pp. 7의 "Yongjunnie"는 용연리라기보다, Y가 T의 오타로 본다면 Tongjunnie(동연리)로 읽힐 수가 있다.
18. William B. Harrison, "Semi-Annual Examination near Kunsan", The Korea Mission Field, Vol. 3, No. 1, Jan. 1907, pp. 7

백종근 목사는 한국에서 공과대학과 대학원을 마치고 산업연구원(KIET)에 책임연구원으로 근무하다 미국에 유학 후 신학으로 바꿔 오스틴 장로교 신학교(Austin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에서 M.Div 과정을 마치고 미국장로교(PCUSA)에서 목사가 되었다. 오레곤(Portland, Oregon)에서 줄곧 목회 후 은퇴해 지금은 피닉스 아리조나(Phoenix, Arizona)에 머물고 있다. 지난 펜데믹 기간 남장로교 초기 선교역사에 매몰해 『하나님 나라에서 개벽을 보다』와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 두 권의 저서를 냈으며 그 가운데 하위렴 선교사의 선교 일대기를 기록한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는 출간된 지 일 년도 되지 않아 스탠포드 대학 도서관 Koean Collection에 선정되어 소장되기도 했다. 백종근 목사는 하위렴 선교사 기념사업회를 설립해 미국과 한국에서 설교와 지역 교회사 세미나를 인도하기도 했다. 최근에도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자료를 정리해 집필 중에 있으며 한편 디아스포라 선교역사 연구회를 결성해 미주 한인 교회 역사를 찾아보는 일에 시간을 보내고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