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작 그만, 주님 앞에 선 나의 모습
어릴 적 즐겨보던 코미디 프로그램 중에 "동작 그만"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군부대 안에서 동료들 몰래 빵을 먹다가 "동작 그만"이라는 말에 입 주위에 크림을 묻히고 얼어붙은 모습을 보고 웃었던 추억이 기억난다. 그런데 주님이 갑자기 오셔서 나를 향해 "동작 그만"이라고 외치시면 내 모습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요즘 큐티 말씀에서 나는 요시야 왕을 만나고 있다. 요시야는 8살에 왕위에 올라 31년간 유다를 다스렸다. 성전을 정비하다 발견된 말씀을 읽고 옷을 찢으며 회개한 후 말씀을 따라 살겠다고 결단하며 유다 안의 모든 우상들을 제거한다. 어느 왕도 없애지 못했던 산당은 물론 아세라 신상들을 부수고 불태운다. 남유다 안에서 우상 숭배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기 위해 직접 사마리아까지 가서 우상들을 부수고 불태운다. 이런 모습에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 돌이킨 왕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다(왕하 23:25)"고 성경은 칭찬한다.
이런 요시야 왕을 보면서 개혁은 누가 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교회의 회복도, 부흥도 누가 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가슴을 찢으며 결단해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그런데 이런 요시야 왕이 므깃도 전투에서 죽는다. 그것도 39살의 젊은 나이에 죽는다. 반면에 악한 왕의 대명사인 므낫세는 55년을 통치하며 장수한다. 히스기야 왕은 죽을 병에서 15년을 연장받아 장수한다.
그리고 그 15년 동안에 므낫세를 낳고, 교만함으로 유다를 범죄케 함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온다. 개혁으로 전에도 후에도 이런 왕이 없다는 요시야 왕은 젊은 나이에 죽지만 악한 왕들은 오래 산다. 헷갈린다. 헷갈림 속에서 요시야의 개혁이 공중으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를 만들고, 요시야의 타협하지 않는 결단 있는 믿음이 다니엘과 세 친구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요시야는 유다의 멸망이라는 그 험악한 꼴을 보지 않고 일찍 죽는다. 그렇다면 진정한 축복은 무엇일까? 오래 살고, 교회를 성장시키고, 무슨 업적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삶의 목적은 오래 살고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사는 것이다. 열심히 살다가 39살에 죽어도 그 죽음 앞에 예레미야가 만들어지듯, 나의 삶을 통해 누군가에게 예수님의 향기를 조금이라도 풍겼다면 괜찮다. 스데반의 죽음을 통해 바울이 회심하는 계기를 만들어주듯, 나의 하루도 그렇게 살고 싶다. 그래서 요즘 아침마다 하나님께 좀 더 예수님을 생각하고 닮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고 기도한다. 내게 주어진 하루가 기회이다.
나의 옛 습관과 싸우느라 처절할 때가 아니라 예수님께 나의 사랑을 고백할 때, 예수님이 오셔서 내게 "동작 그만"이라고 하셨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과의 사랑의 교제가 더 길어져야겠다.
사랑해요, 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