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사무엘상 18장 14절 - 19절
다윗에 대한 사울 왕의 실제적 위협이 시작되었습니다. 자신을 위해 수금을 연주하고 있던 다윗을 죽이기 위해 사울 왕이 창을 던집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하지만 그의 시도는 실패합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사울 왕의 이런 적대 행위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사울 왕의 병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악신에게 시달림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유를 알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용납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모든 일에 신중하고 지혜롭게 대응했습니다. 본문 14절에 보면, “그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했습니다. 양을 치든지, 궁중에 있든지, 심지어 전쟁터에 있을지라도 다윗은 지혜롭게 행했습니다.
여기에서 다윗의 진면목이 등장합니다. 다윗은 지혜롭게 행동했습니다. 혹 어떤 사람은 이 말씀을 오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다윗이 본래 똑똑하고 총명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렇게 행동했겠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지혜롭게 행동했다는 말은 그가 똑똑하고 총명한 사람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의 지혜로움의 이유를 우리는 성경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심이라.” 다윗의 지혜로움은 그의 총명함과 똑똑함에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심에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셨습니까? 우리는 그 이유를 역대하 15장 2절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저를 찾으면 저가 너희의 만난 바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저를 버리면 저도 너희를 버리시리라.”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너희가 만일 저를 찾으면...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하신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늘 하나님과 함께 했습니다. 다윗은 늘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지혜로울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 한 가지 있습니다.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닙니다. 건강도 아니고, 장수도 아닙니다. 하지만 한 가지 우리가 구하기만 하면 아낌없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5절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지혜를 주시되 후히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낌없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지혜는 지식과 다릅니다. 지식이란 책을 통해서, 교육을 통해서, 스승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쌓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남에게 전수할 수 있고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에게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지혜는 스스로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혜란 무엇입니까? 쉽게 말하면 사는 법입니다. 때로는 판단하고, 때로는 결심하고, 때로는 포기하고, 때로는 뒤로 물러나고, 때로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러한 문제들은 교육이나 지식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삶의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왕이 되자마자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 왕의 간청을 기뻐하시면서 지혜뿐만 아니라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화까지 더하여 주셨습니다. 다윗이 지혜로울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지혜는 그를 보호해주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복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어려운 일에 봉착하면 제일 먼저 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은 언제든 이 기도에는 가장 먼저 응답해 주십니다. 지혜를 구하되 의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구하십시오. 하나님은 언제든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응답해 주십니다. 다른 말은 못 듣더라도 최소한 지혜의 사람이라는 말은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다윗이 이처럼 모든 일에 지혜롭게 행하자 더 이상 사울 왕은 자기 손으로 다윗을 죽일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그 이유를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다윗의 크게 지혜롭게 행함을 보고 그를 두려워하였으나 온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윗을 사랑하였으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윗의 지혜로움을 알았습니다. 그가 지혜의 사람임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알았습니다. 그러자 많은 백성들이 다윗을 더욱 좋아하고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만일 사울 왕이 자기 손으로 다윗을 죽였다가는 사단이 날 판이었습니다. 결국 사울 왕은 좀더 교묘한 계략을 꾸미게 됩니다. 자기 손으로 죽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손으로 다윗을 죽일 계략을 꾸미게 됩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불렀습니다. “내 맏딸 메랍을 네게 아내로 주리니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용맹을 내어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라.” 여기서 사울 왕은 두 가지로 다윗을 꾀입니다. 첫째는 자신의 맏딸을 다윗에게 아내로 주겠다고 꾀입니다. 만일 다윗이 허영에 눈이 어두운 사람이었다면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왕의 사위가 된다는 것은 힘과 명예가 약속되어 있는 자리였습니다. 사울 왕은 다윗을 자기 딸을 미끼로 꾀입니다. 하지만 이런 꾐이 얼마나 사악한 것이었는지를 우리는 그 다음 구절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19절입니다. “사울의 딸 메랍을 다윗에게 줄 시기에 므흘랏 사람 아드리엘에게 아내로 준 바 되었더라.” 메랍을 다윗에게 주겠다고 말해놓고는 다윗에게 주어야 할 때가 다가오자 사울 왕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른 사람에게 자기 딸을 보냅니다. 타락한 사람의 말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마음이 여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믿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지혜롭지 못한 것입니다. 사울 왕은 이런 방법을 통해 다윗을 모욕했습니다. 다윗에게 수치를 안겼습니다. 이런 사울 왕의 처사는 결국 딸자식에게 피눈물을 안깁니다. 메랍이 므흘랏 사람에게 낳은 다섯 아들이 사울 왕을 대신하여 인질이 되고 결국 한 날 한 시에 교수형에 처해지는 비극을 맞게 됩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꾀인 두 번째는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라고 꾀인 것입니다. 다윗을 죽이기 위해 전쟁터로 내보내려는 사울 왕은 다윗에게 이 전쟁은 여호와의 싸움이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시편 55편에서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그 입은 우유 기름보다 미끄러워도 그 마음은 전쟁이요, 그 말은 기름보다 유하여도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 살기를 품은 자의 입에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라는 말이 나옵니다. 얼마나 위선적입니까? 얼마나 비열합니까? 가장 비열한 위선은 늘 영적 언어의 탈을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경건한 척, 영적인 척하지만 그의 속에는 미움과 살기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런 말에 속기 쉽습니다. 만일 다윗이 전쟁을 하지 않으려 한다면 사울 왕은 저가 하나님을 위해 싸우지 않으려 한다고 욕할 수 있었습니다. 입으로만 경건하고 영적인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기에 주님은 열매를 보고 판단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행동과 행실을 보고 판단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울 왕은 이 두 가지로 다윗을 꾀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동시에 그가 사울 왕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겸손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런 사울 왕의 꾐에 이렇게 답변합니다. “내가 누구며, 이스라엘 중에 내 친속이나 내 아비의 집이 무엇이관대 내가 왕의 사위가 되리이까?” 다윗에게 세상적인 영예는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육신의 이익은 다윗에게 아무 유익이 되질 못했습니다. 그는 “내가 누구입니까?”라고 오히려 사울 왕에게 되묻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가장 겸손한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인 프란체스코에게 그의 제자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겸손이란 무엇입니까?” 그러자 이 질문에 대해 프란체스코가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겸손이란 하나님의 눈으로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일세.” 어떤 청년이 “하나님의 눈으로 당신을 본다면 당신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했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본다면 나는... 죽일 놈이죠.” 하나님은 이처럼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잘 알고 있던 다윗을 쓰시고 높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약 4:6)”
결국 다윗의 대답은 “내가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다가 죽더라도 어떻게 나 같은 놈이 왕의 딸과 결혼할만한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라는 뜻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사울 왕의 꾐은 무산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그렇게 원치 않았던 사울 왕의 사위가 됩니다. 그것은 사울 왕의 둘째 딸 미갈이 그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미갈은 다윗을 궁지에서 건져주는 좋은 아내가 됩니다. 아무리 악한 자가 하나님의 사람을 죽이려고 하고 온갖 모략과 계획을 다 짜내어 함정에 빠뜨리려고 해도 그 모든 일은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 16:4).” 세상이 악해지면 악해질수록 하나님의 사람들은 더욱 더 순결하고 지혜로워야 합니다. 그래야 이 시대의 구원의 뿌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아낌없이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이 시대의 지혜의 사람으로 사시길 축원합니다.
다윗에 대한 사울 왕의 실제적 위협이 시작되었습니다. 자신을 위해 수금을 연주하고 있던 다윗을 죽이기 위해 사울 왕이 창을 던집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하지만 그의 시도는 실패합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사울 왕의 이런 적대 행위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사울 왕의 병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악신에게 시달림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유를 알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용납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모든 일에 신중하고 지혜롭게 대응했습니다. 본문 14절에 보면, “그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했습니다. 양을 치든지, 궁중에 있든지, 심지어 전쟁터에 있을지라도 다윗은 지혜롭게 행했습니다.
여기에서 다윗의 진면목이 등장합니다. 다윗은 지혜롭게 행동했습니다. 혹 어떤 사람은 이 말씀을 오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다윗이 본래 똑똑하고 총명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렇게 행동했겠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지혜롭게 행동했다는 말은 그가 똑똑하고 총명한 사람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의 지혜로움의 이유를 우리는 성경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심이라.” 다윗의 지혜로움은 그의 총명함과 똑똑함에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심에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셨습니까? 우리는 그 이유를 역대하 15장 2절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저를 찾으면 저가 너희의 만난 바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저를 버리면 저도 너희를 버리시리라.”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너희가 만일 저를 찾으면...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하신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늘 하나님과 함께 했습니다. 다윗은 늘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지혜로울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 한 가지 있습니다.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닙니다. 건강도 아니고, 장수도 아닙니다. 하지만 한 가지 우리가 구하기만 하면 아낌없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5절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지혜를 주시되 후히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낌없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지혜는 지식과 다릅니다. 지식이란 책을 통해서, 교육을 통해서, 스승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쌓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남에게 전수할 수 있고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에게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지혜는 스스로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혜란 무엇입니까? 쉽게 말하면 사는 법입니다. 때로는 판단하고, 때로는 결심하고, 때로는 포기하고, 때로는 뒤로 물러나고, 때로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러한 문제들은 교육이나 지식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삶의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왕이 되자마자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 왕의 간청을 기뻐하시면서 지혜뿐만 아니라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화까지 더하여 주셨습니다. 다윗이 지혜로울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지혜는 그를 보호해주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복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어려운 일에 봉착하면 제일 먼저 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은 언제든 이 기도에는 가장 먼저 응답해 주십니다. 지혜를 구하되 의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구하십시오. 하나님은 언제든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응답해 주십니다. 다른 말은 못 듣더라도 최소한 지혜의 사람이라는 말은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다윗이 이처럼 모든 일에 지혜롭게 행하자 더 이상 사울 왕은 자기 손으로 다윗을 죽일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그 이유를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다윗의 크게 지혜롭게 행함을 보고 그를 두려워하였으나 온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윗을 사랑하였으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윗의 지혜로움을 알았습니다. 그가 지혜의 사람임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알았습니다. 그러자 많은 백성들이 다윗을 더욱 좋아하고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만일 사울 왕이 자기 손으로 다윗을 죽였다가는 사단이 날 판이었습니다. 결국 사울 왕은 좀더 교묘한 계략을 꾸미게 됩니다. 자기 손으로 죽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손으로 다윗을 죽일 계략을 꾸미게 됩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불렀습니다. “내 맏딸 메랍을 네게 아내로 주리니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용맹을 내어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라.” 여기서 사울 왕은 두 가지로 다윗을 꾀입니다. 첫째는 자신의 맏딸을 다윗에게 아내로 주겠다고 꾀입니다. 만일 다윗이 허영에 눈이 어두운 사람이었다면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왕의 사위가 된다는 것은 힘과 명예가 약속되어 있는 자리였습니다. 사울 왕은 다윗을 자기 딸을 미끼로 꾀입니다. 하지만 이런 꾐이 얼마나 사악한 것이었는지를 우리는 그 다음 구절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19절입니다. “사울의 딸 메랍을 다윗에게 줄 시기에 므흘랏 사람 아드리엘에게 아내로 준 바 되었더라.” 메랍을 다윗에게 주겠다고 말해놓고는 다윗에게 주어야 할 때가 다가오자 사울 왕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른 사람에게 자기 딸을 보냅니다. 타락한 사람의 말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마음이 여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믿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지혜롭지 못한 것입니다. 사울 왕은 이런 방법을 통해 다윗을 모욕했습니다. 다윗에게 수치를 안겼습니다. 이런 사울 왕의 처사는 결국 딸자식에게 피눈물을 안깁니다. 메랍이 므흘랏 사람에게 낳은 다섯 아들이 사울 왕을 대신하여 인질이 되고 결국 한 날 한 시에 교수형에 처해지는 비극을 맞게 됩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꾀인 두 번째는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라고 꾀인 것입니다. 다윗을 죽이기 위해 전쟁터로 내보내려는 사울 왕은 다윗에게 이 전쟁은 여호와의 싸움이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시편 55편에서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그 입은 우유 기름보다 미끄러워도 그 마음은 전쟁이요, 그 말은 기름보다 유하여도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 살기를 품은 자의 입에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라는 말이 나옵니다. 얼마나 위선적입니까? 얼마나 비열합니까? 가장 비열한 위선은 늘 영적 언어의 탈을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경건한 척, 영적인 척하지만 그의 속에는 미움과 살기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런 말에 속기 쉽습니다. 만일 다윗이 전쟁을 하지 않으려 한다면 사울 왕은 저가 하나님을 위해 싸우지 않으려 한다고 욕할 수 있었습니다. 입으로만 경건하고 영적인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기에 주님은 열매를 보고 판단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행동과 행실을 보고 판단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울 왕은 이 두 가지로 다윗을 꾀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동시에 그가 사울 왕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겸손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런 사울 왕의 꾐에 이렇게 답변합니다. “내가 누구며, 이스라엘 중에 내 친속이나 내 아비의 집이 무엇이관대 내가 왕의 사위가 되리이까?” 다윗에게 세상적인 영예는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육신의 이익은 다윗에게 아무 유익이 되질 못했습니다. 그는 “내가 누구입니까?”라고 오히려 사울 왕에게 되묻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가장 겸손한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인 프란체스코에게 그의 제자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겸손이란 무엇입니까?” 그러자 이 질문에 대해 프란체스코가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겸손이란 하나님의 눈으로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일세.” 어떤 청년이 “하나님의 눈으로 당신을 본다면 당신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했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본다면 나는... 죽일 놈이죠.” 하나님은 이처럼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잘 알고 있던 다윗을 쓰시고 높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약 4:6)”
결국 다윗의 대답은 “내가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다가 죽더라도 어떻게 나 같은 놈이 왕의 딸과 결혼할만한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라는 뜻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사울 왕의 꾐은 무산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그렇게 원치 않았던 사울 왕의 사위가 됩니다. 그것은 사울 왕의 둘째 딸 미갈이 그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미갈은 다윗을 궁지에서 건져주는 좋은 아내가 됩니다. 아무리 악한 자가 하나님의 사람을 죽이려고 하고 온갖 모략과 계획을 다 짜내어 함정에 빠뜨리려고 해도 그 모든 일은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 16:4).” 세상이 악해지면 악해질수록 하나님의 사람들은 더욱 더 순결하고 지혜로워야 합니다. 그래야 이 시대의 구원의 뿌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아낌없이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이 시대의 지혜의 사람으로 사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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