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이자 신학자인 김교신은 일제강점기에서 조선인을 성서적ㆍ도덕적으로 다시 세우는 것을 자신의 역사적 과제로 삼았다. 기독교 역사가인 저자 전인수 교수(강서대학교 교회사)는 이 책에서 그의 삶과 생각을 다루며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당면한 문제들을 향해 기꺼이 고난의 길을 걸어가고자 했던 김교신의 애쓴 삶을 그린다.
저자는 책 속에서 "이 책은 단편적으로만 다루어왔던 김교신의 삶을 차분하게 정리하고 싶은 개인적 욕구에서 출발하였다. 나는 김교신을 역사적·신앙적으로 살펴보려 노력하였다. 한 인물을 묘사하는 데 있어 역사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하다. 또 김교신은 신앙적 접근을 하지 않고는 파악할 수 없는 인물이다. 기독교 신앙을 제외하고 그를 그려보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할 것이다. 김교신에게 기독교 신앙은 삶을 움직이는 실체였기 때문이다"고 했다.
그는 " 일본에서 김교신은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고, 신앙의 가장 중요한 토대를 닦아 주었던 스승 우치무라를 만났다. 김교신은 1920년 4월 18일 처음으로 교회에 갔다. 이 신앙의 영적 생일은 우연히도 그의 생일과 동일했다"며 "김교신은 신앙 초기에 내세의 문제보다 현생의 문제에 천착했다. 어떻게 하면 하루라도 완전에 이를 수 있을지가 그의 최대 관심사였다"고 했다.
이어 "일본인과 조선인이 참 형제라는 인식도, 모든 사람이 사해동포라는 생각도 내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철저한 자기 인식 없이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라며 "김교신을 비롯한 동인들이 「성서조선」을 편찬한 이유는 조선을 성서화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에게 조선은 살 중의 살이자 뼈 중의 뼈였다. 특히 김교신의 조선 사랑은 잘 알려져 있다. 조선은 그의 생각을 지배했다. 송두용은 '김교신은 예수보다 조선을 더 사랑했다'고 증언할 정도였다. 류석동은 '조선 사랑이 김교신의 적혈구 전부까지 점령했다'고 말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김교신이 인물지리학과 역사지리학에 천착한 이유가 있다. 그는 먼저 지리학의 중심적인 관심은 각지의 산물인데 그 중 최고의 산물이 사람이라고 보았다. 김교신은 매우 엄격한 선생이었다. 그는 개학 첫날에 모든 학생들을 출석하도록 해 전학기의 학업 기강을 세우려고 하였고 학생들에게 조퇴하지 말라고 엄하게 훈계하였다"고 했다.
끝으로 저자는 "김교신은 현 조선교회의 교직자들 중 사역을 밥벌이로 하는 사람들이 많고 많은 교회가 이권화 하였기 때문에 자신은 그들의 입장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또한 김교신은 이미 교회 안에만 구원이 있다는 일부 교권주의자들의 주장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음을 수없이 밝혔다"며 "김교신은 신앙대로의 삶을 살려고 노력하였다. '하루살이'를 추구하였던 만큼 기독교 신앙은 생활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