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국내의 교회사회를 보면,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말아야 할 성경의 진리와 생명의 말씀이 너무나도 무질서하게, 여과되지 않은 채, 자유주의적이고 현대신학적 사상의 편린들에 의해 침습을 당하고 있는 실태이다.
복음의 일선에서 활약하고 있는 신학교 교수나 신학자, 또 목회자들이 이러한 위기적 상황에 제대로 채비를 갖추지 못하고 무방비하고 무력한 채 방임하거나 도리어 편승하는 결과를 낳는다면, 그들이 가르치는 신학생들이나 목양하는 교인들의 영적 상황은 그 얼마나 핍절하고 곤궁하기 그지 없겠는가?
실제로 세인들 뿐만 아니라 언필칭 크리스찬인 이들이 유행의 첨단인양, 니이체나 쇼펜하우어를 무분별하게 애독하거나, 방송 매체에서 지성을 과시하듯 인용하는가 하면, 더 나아가 자녀들에게 양서로 권독을 하기도 한다.
슐라이어마허의 영향 때문인지 요즘의 교계 신학교를 보면 목회를 사명보다는 일반 직업군의 하나로 보는 경향이 농후하다. 영혼에 대한 관심이 전무한 신입이라도 세상 지식만 있으면 추켜세우고 안수를 서둘러 독려하는가 하면, 세상적으로 잘난 사람이 많이 모여야 신학교가 돋보이고 학생들을 끌기 용이한 홍보수단으로 여기기까지 하는 모양새니, 영혼을 양육하고 훈련해야할 신학교가 도리어 영혼을 실족시키는 도구가 될까 심히 염려스럽다.
그런가하면, 니체 사상의 계보라 할 수 있는 한 신학교수란 자는 그간 끊임없이 대중들을 상대로 기독교를 모욕해온 것도 모자라다는 듯, 그의 2세 또한 대를 이어 본격적으로 국내 모 여성잡지를 통해 그리스 신화가 성경의 가치에 필적이라도 하는 대단한 것인 양, 세인들을 오도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판도는 실상 계몽주의 시대상의 리바이벌인 것으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할 크리스찬이라면 누구나, 동시대인들이나 앞으로 오는 세대의 위태한 신앙적 환경을 생각할때, 참으로 위기의식과 더불어 통탄스러운 심정을 금할 길이 없을 것이다.
루터의 종교개혁후17-18 세기, 역사적인 대변혁기를 거치는 동안 이성의 발흥이 가져온 계몽주의와 더불은 자유주의 신학적 사조는 시대를 거치는 동안, 근대니 현대니 포스트모더니즘이니 각기 다른 브랜드를 걸쳐왔을 뿐, 그 근본에 있어선 동일하게 절대자 하나님의 인격성과 그의 근본 본체인 그리스도와 절대 진리의 말씀을 해체해온 주역인 것이다.
그러므로 17-18세기, 교회사에 등장한 불행한 신앙적 흐름을 면밀히 검토하고 신앙과 이성의 상관관계를 되짚고 추적하는 작업은, 현재의 혼란한 영적 환경을 수습하고 쇄신을 다지고 초대교회적인 산 신앙을 회복하기 위한 시금석이 되는 일이다.
종교철학 소설인 “횔덜린, 니체, 고흐”는 후세에 천재성을 인정받은 성공자들이라 하기엔, 너무도 불행한 영성의 아이콘으로 대변되는 이 세 인물의 비극적 삶을 신앙의 눈으로 추적한 소설이다. 따라서 이 소설은 종교와 철학과 문학 그리고 신학과 신앙 사이의 유기적 연관성을 신학생인 주인공의 눈으로 기독교적 영성의 관점에서 깊이있게 조명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소설은 신학적 이론서적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곳곳에 삶의 자리 한 가운데에서 나레티브를 곁들임으로써 독자와의 공감을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한 책이다. 물론, 독자의 이해나 인내의 한계를 시험하는 부분들도 없지 않겠지만, 무엇보다 사색의 지경을 넓힐 수 있고, 소설이니 만큼 픽션 부분도 있고 소설다운 재미도 없지 않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을 비유로 표현하자면, 단품요리가 아니라 뷔페식 요리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횔덜린,니체,고흐”를 일독을 하게되면, 오고 가는 세대에서 그 누가 어떤 명분을 가지고 어떤 방법을 통해 어떤 모양으로 복음의 진리에 도전을 가하거나 침습해 올지라도, 어느덧 그의 생각이 기초한 루트를 총체적으로 자명하게 파악할 수 있는 영분별의 눈이 열리게 되는 유익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