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으로 돌아가라
여호수아 8장 1절-29절
아이성 전투의 패배 원인이 아간의 범죄 때문이라는 것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는 하나님 앞에서 떳떳할수 없었다. 아무리 아이성의 패배가 아간의 범죄 때문이라고 변명해 보아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었다. “자신은 자만했고, 하나님께 묻지 않았고, 하나님께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여호수아는 자신이 교만했던 모습, 헛세를 부렸던 모습 때문에 부끄워서 하나님 앞에서 일어설 수가 없었다. 변명하고 핑계를 해봐도 다른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자기 자신은 속일 수 없었다.
여호수아에게는 부끄러움도 있었지만 동시에 두려움도 찾아왔다. 첫번째는 죄책감이고 두번째는 두려움이다. 실패를 몰랐던 여호수아에게 아이성의 패배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다시 전쟁을 하는 것이 두려웠다. 더 이상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라는 두려움도 있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 두 가지 감정에 동시에 찾아온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반드시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회개함으로 죄책감과 두려움을 온전히 치료를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탄이 죄책감과 두려움으로 공격해서 우리 인생을 무너뜨린다. 사울왕을 보라. 죄책감과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인생이 무너졌다. 가룟유다도 마찬가지다. 반면에 오랜 시간 엎드려 하나님 앞에 머물러 있었던 다윗과 베드로는 죄책감과 두려움을 치료받고 하나님의 손에 사용되었다.
엎드려 있던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의 회복의 메시지가 선포되었다. 1절을 보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군사를 다 거느리고 일어나 아이로 올라가라 보라 내가 아이 왕과 그의 백성과 그의 성읍과 그의 땅을 다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한번 실패한 사람이 다시 시작할 때는 처음보다 훨씬 더 큰 두려움을 느낀다. 이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힘을 주시는 것이다. “내가 너를 보낸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 그러니까 두려워 하지 말고 일어나서 다시 아이성을 공격하라.”는 것이다. 두려움을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이성을 공격할 때 중요한 두 가지 명령을 내리셨다.
첫번째는 군사를 다 거느리고 일어나 아이로 올라가라는 것이다. 아이성의 규모나 적군의 숫자로 봤을 때에는 전군이 다 올라가서 싸울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호수에게 한 사람도 남기지 말고 다 데리고 가서 전쟁을 하라고 하셨다. 이번에는 여호수아가 직접 지휘해서 전군대가 나가서 싸우라고 했다.
여기서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기본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교만과 자만심을 다 버리고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주어진 환경에 빨리 적응하는 존재다. 경험과 실력이 쌓이고, 성공하고 인기를 얻게 되면 처음에 가졌던 마음을 잃어버리고 현재 자기가 누리고 있는 것에 쉽게 적응해 버린다. 마치 과거의 모습을 잊은 사람처럼 행동과 태도에 교만함이 묻어나고, 정말 중요하게 해야할 것을 귀찮다고 하지 않는다. 이때 문제가 찾아온다.
이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다시 기본과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어디에서 문제가 발생했는지 진단을 해야한다. 하나님은 첫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어디에서 떨어졌는지 생각하고, 회개하고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하셨다.(계2:4-5) 하나님이 모든 백성이 다 올라가라고 하신 것은 여호수아 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들에게 초심과 기본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라는 명령이다.
두번째 명령은 거기서 탈취할 물건과 가축은 스스로 가지라고 하셨다.(2절) 이것은 여리고성 전투를 할 때 전리품에 하나도 손대지 말고 하나님께 다 받쳐라는 명령과 상반되는 명령이다. 언제는 전리품에 하나도 손대지 말라고 하고, 언제는 다 가지라고 하는가? 대부분의 전쟁에서 모든 전리품들을 전쟁하는 군인들이 다 가지게 하셨다. 아주 특별한 이유가 있을 때에만 전리품에 손대지 못하게 하셨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점령하는 전쟁을 31번 치를 때에도 딱 한번 여리고성 전투에서만 이 명령을 내리셨다.
이런 전쟁을 헤렘전쟁이라고 표현한다. 헤렘이라는 단어는 ‘분리하다. 금하다’ 혹은 '성별하다’는 뜻을 가진다. 두 가지 의미로 보면 된다. 첫번째는 하나님의 주권을 세우시기 위해서이다. 두번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우상들에게 위협당하지 않기 위해서다. 하나님의 주권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룩함이 지켜져야 물질이 풍부하고 이방 문화로 가득한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다. 부유하고 편해지는 삶 속에서 신앙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다. 사실 이 명령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키기 위한 명령이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하나님을 오해할 때가 있다.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가난해야 하고, 인생을 즐기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거룩함을 늘 회개하고 반성하는 어두운 얼굴로 사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경우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풍성하게 주시는 분이다.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기름짐으로 채워주시는 분이다. 생명을 얻고 더 풍성하게 하시는 분이다. “12.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13.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전3:12-13) 세상을 쫓아 살지 말라는 것은 성공과 인기와 인생의 즐거움을 목표로 삼고 살지 말라는 말이다. 방향을 잃어버리지 말라는 말이다.
아이성 전투에는 특징이 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기적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철저하게 여호수아의 손에 맡겨두었다. 물론 하나님이 지혜를 주셨다. 그런데 작전부터 시작해서, 실행하고 마무리 하는 것까지 전부다 여호수아가 하게 했다. 이렇게 해야 온전히 초심으로 돌아가고, 기본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아이성 공격 그림>
여호수아는 기본으로 돌아가서 혼신의 힘을 다해서 전쟁을 준비했다. 밤을 틈타서 하루 전에 3만명의 매복군을 아이성 서쪽으로 먼저 올려보내서 매복을 시켰다.(3절) 다음날 아침 여호수아는 본대를 이끌고 아이성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다시 5천명 뽑아서 아이성과 벧엘 사이에 매복을 시켰다.(12절) 이미 하루 전에 3만명을 매복시켰는데 왜 또 5천명을 매복시켰는지 이유는 나오지 않는다. 아마도 5천명은 벧엘성에서 아이성을 돕기 위해서 오는 지원군을 차단하기 위함이 아닌가 생각이 된다. 3만명은 아이성 사람들이 성문을 열고 이스라엘 군대를 뒤 쫓아갈 때 아이성을 점령하는 역할을 맡겼다.
여호수아의 작전은 이름하여 <매복과 작전상 후퇴 전략>이다. 먼저 매복을 시키고 난 뒤 여호수아는 본대를 이끌고 아이성 앞으로 가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공격을 하다가 패배하는 척 하면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아이성 사람들은 이번에도 이겼다고 생각하고 성밖으로 나와서 문을 열어 놓은 채로 이스라엘 군대를 추격했다. 그때 미리 성 주위에 매복해 있던 군인들이 아이성을 점령해버렸다. 아이성을 점령했다는 신호로 연기가 피어 오르자 도망가던 이스라엘 군대가 돌아서서 아이 사람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아이성 사람들은 여호수아가 이끄는 군대와 매복군 사이에 포위 당해서 모두다 죽었다. 그때 5천명의 군인들은 벧엘에서 오는 지원군이 오지 못하도록 길목을 차단해 버렸다. 얼마나 탁월한 계획인가?
이 작전은 지난 전쟁의 실패에서부터 나온 것이다. 1차 전쟁에서 실패를 했기 때문에 아이성 사람들을 유인할 수 있었다. 여호수아는 자신의 실패의 경험을 통해서 배운 것이다. 실패한 자리에서 기본과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한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실패를 한다. 누구나 상처가 있다. 사탄은 우리의 과거의 상처를 쓴 뿌리로 만들어서 우리를 괴롭히고, 자기가 원하는대로 조종한다. 에서는 야곱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스스로 자기 인생을 망가 뜨렸다. 자신의 장자권을 빼앗아간 동생 야곱을 아버지 이삭과 어머니 리브가가 축복을 해주고, 삼촌인 라반에게 보내서 거기서 아내를 얻게 하는 것을 보았다. 그 반발심으로 가나안 여자랑 결혼해서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하나님의 언약에서 벗어나는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동생 야곱에 대한 복수심으로 평생을 살아가면서 자기 인생을 불행으로 몰아넣었다.
반면에 하나님은 과거의 상처를 강점으로 바꾸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용하신다. 실패를 성공의 재료로 만드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다. 야곱은 삼촌 라반에게 10번이나 배신 당하고,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죽음도 경험한다. 딸 디나가 세겜의 추장에게 강간을 당하는 것을 보고, 아들 요셉을 잃어버리는 아픔도 겪는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언약을 깨달아 간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사람이 되었다. “14.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창43:14) 과거의 실패와 고통을 통해서 아브라함, 이삭을 통해 내려온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가는 진짜 장자로 거듭났다. 이런 야곱에서 12 아들을 주셔서 12지파를 이루게 하셨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이루는 축복을 주셨다. 이름도 속이는 자 야곱에서 승리자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셨다.
여호수아도 자신의 실패를 발판으로 삼았다. 과거의 실패를 미래를 살아가는 좋은 재료로 삼았다. 아이성 전투의 실패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겸손하게 하고 초심으로 돌아가게 하는 버튼이 되었다. 교만해지려고 하다가도 그 버튼이 눌러지면 초심으로 돌아가 전심으로 하나님께 의지하게 되었다. 나머지 전쟁에서 모두 이긴 것은 아이성의 실패가 있었기 때문이다.
구원 받은 우리는 모두다 과거에 실패한 인생들이다. 죄로 인해서 죽은 인생들이다. 공중 권세잡은 자를 따라서 부끄러운 인생을 산 사람들이다. 그런데 구원 받은 우리는 과거의 아픔을 곱씹으면서 고통 속에 살아갈 필요가 없다. 예수님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미 우리의 과거의 모든 죄와 실수를 다 해결하셨다. 저주와 재앙을 축복으로 바꾸셨다.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셨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를 대신 해서 죽으심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 예수님이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이긴 그리스도로 우리의 마음에 받아들이면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새롭게 하신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모든 과거는 미래를 살아가는 재료와 발판이 된다. 과거의 실패로 더 새로워졌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마음과 생각까지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으로 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인생, 새로운 목표를 삼아야 한다.
전옥표씨가 쓴 <모세처럼 기도하고 여호수아처럼 실행하라.>라는 책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런던 비즈니스 스쿨 교수인 도널드 설은 기업들이 망하는 이유는 기업들이 '활동적 타성(Active Inertia)'에 빠져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기업이 성공할 때까지는 열심히 연구하고 노력하다가, 성공했을 때에는 한번 성공한 방식을 고집하면서 변화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글로벌 기업인 코닥(KODAK)은 카메라 업계의 최고 강자였다. 이 코닥이 1975년에 가장 먼저 디지털 카메라를 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필름만 고집하다가 실패했다. 모트롤라는 아나로그 방식을 사용하던 시절에 휴대폰의 최대 강자였다. 그런데 디지털 시대의 변화에 대처하지 못해서 애플과 삼성에 시장을 빼앗겨 버렸다. 현재의 성공에 취해서 기본으로 초심으로 돌아가서 연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창조적인 분이시다. 한번도 같은 일을 같은 방식으로 해 보신 적이 없는 분이시다. 홍해를 가를 때에는 모세가 지팡이를 내리치게 하셨고, 요단강을 가를 때에는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물로 들어가게 하셨다. 여리고성은 7번 도는 것으로 무너뜨렸지만, 아이성은 고도의 전술 전략을 동원해서 점령했다. 어떤 소경은 그냥 말씀으로 명령을 하셔서 눈을 뜨게 하시고, 또 어떤 소경은 진흙을 발라서 실로암게 가서 씻게 하셔서 고치게 하셨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창조적인 하나님과 신앙생활 한다. 타성에 젖어서 신앙생활 하는 것을 버려라. 지금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안심하면 안된다. 예배를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날마다 새롭게 하나님을 만나라. 기본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갈망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간구하라. 가장 어려울 때 하나님을 찾았던 것처럼, 지금 하나님을 찾으라. 그럼 하나님이 우리의 지경을 넓히시고, 새로운 일을 보여주실 것이다. 다시 신앙의 기본과 초심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무너진 삶을 일으키는 역사가 일어나길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