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의 비결
여호수아 5장 13절-6장 11절
성경에서 여호수아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곳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말렉과 전쟁을 치를 때다. 아멜렉과의 전쟁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치른 공식적인 첫 전쟁이었다. 이스라엘은 대승을 거두고 승리를 기념하는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여호와는 나의 깃발)라고 이름을 붙였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모세가 산꼭대기에서 손을 들고 기도했을 때 이긴 전쟁이다. 이때 산 아래 전쟁터에서 전쟁을 지휘했던 사령관이 여호수아였다.
이때부터 이스라엘이 치르는 모든 전쟁을 여호수아가 사령관으로 지휘했다. 여호수아는 무려 40년 동안 크고 작은 전쟁을 지휘하면서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다. 더더욱 40년 동안 전쟁에서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다.
가나안 땅을 정복해 나가는 모습을 보면 여호수아가 얼마나 뛰어난 지략가인지를 알 수 있다. 여호수아는 닥치는 대로 밀고 들어가지 않았다. 가나안 땅의 허리를 잘라서 남쪽과 북쪽을 갈라놓고 먼저 남쪽을 점령하고 그리고 난 다음에 북쪽을 점령했다. 가나안 족속들이 연합전선을 구축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항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영국군 총사령관이었던 알렌비 장군이 여호수아가 했던 작전을 그대로 모방하여서 팔레스타인지역을 점령했다. 그리고 6. 25때 맥아더 장군이 보여줬던 인천상륙작전이 이와 유사한 작전이다.
여호수아가 이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반드시 점령해야 하는 곳이 여리고 성이었다. 왜냐하면 여리고성이 가나안 땅의 허리로 들어가는 관문이었기 때문이다. 길갈에 베이스 캠프를 친 여호수아가 대대적인 여리고성 공격을 감행할 것이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여리고성 사람들도 이것을 알고는 성문을 걸어 잠그고 방어태세에 들어갔다. 1절을 보자.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 조용하지만 무서운 전운이 감돌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오늘 여호수아가 지시한 여리고성 공격 작전은 여호수아의 명성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엉성하기 짝이 없는 전략이었다. 보통 성을 공격할 때에는 투석기를 사용해서 성벽을 무너뜨리거나, 토성을 쌓아서 성을 공격한다. 그런데 여호수아의 전략은 6일 동안은 성을 하루에 한바퀴씩 돌고, 7일째 되는 날에는 성을 일곱바퀴 돌고 나팔을 부는 것이 전부였다.
지략이 뛰어난 여호수아가 견고한 여리고성을 공격하는데 왜 이렇게 어리석게 보이는 작전을 구사하고 있는 것일까? 5장 13절-15절에 그 이유가 나온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공격할 방법을 구상하기 위해서 정탐을 나갔을 때 칼을 들고 여호수아의 앞을 가로막는 사람이 있었다. 당황한 여호수아가 물었다. “너는 우리를 위하는 사람이냐? 우리 적들을 위하는 사람이냐?” 그 사람이 대답했다.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
우리는 이 질문과 대답에 주목해야 한다. “너는 내 편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편이냐?” 이것이 보통 사람들이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적군과 아군을 나눈다. 도움되는 사람과 도움이 안되는 사람을 나눈다. 화이트 리스트와 블랙 리스트를 만든다.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만들려고 하고, 자기 편이 되지 않으면 적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게 좀더 지나쳐서 하나님까지도 자기편으로 만들려고 한다. “하나님은 내 편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편입니까?”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지극히 자기 중심, 자기욕구 중심으로 신앙생활한다. 기도하면서 자기를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강화시킨다. 종교적인 괴물이 나온다. <사사기의 미가의 모습>
여호수아의 질문에 칼을 든 사람이 대답했다.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 군대장관의 대답은 여호수아의 질문과는 차원이 틀린다. 나는 니편도 상대편도 아니다.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이 전쟁을 지휘하러 왔을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시길 바란다. 내가 주도하고, 내가 계획 세우고, 내가 그림을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도와주시는 분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하나님,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다가 힘이 빠지고, 능력이 안될 때 짠하고 나타나서 해결해 주십시오.” 그런데 하나님은 정반대 이야기를 하신다. 나는 너를 도와주러 온 것이 아니다. 너의 인생의 지휘관으로 왔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신다는 것은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도록 도와주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생에 왕과 주인으로 통치하러 오셨다. 우리 인생에 지휘관으로 오셨다. 예수님이 우리 인생의 왕과 주인이 되어야 구원이 이루어진다.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의 말을 알아 듣고 바로 엎드렸다. 14절을 보자. "그가 이르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하는지라 여호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고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군대장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라고 말을 한다.
이때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한 이야기가 15절이다.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신을 벗는 것은 자신의 권리를 내어 놓는 것 을 말한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다”고 할 때 땅 자체가 거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거룩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네 신발을 벗어라는 말이다. 하나님께 너의 인생의 권리를 양도하고, 너의 인생의 주도 권을 내어 드리라는 말이다. 전쟁 지휘관에게 신을 벗어라는 것은 무엇인가? 전쟁 지휘권을 넘겨라는 말이다.
여호수아 같은 사람이 지휘권을 넘겨주는 것이 얼마나 힘들겠나? 여호수아 자신보다 뛰어난 지휘관이 어디 있나? 여호수아의 머릿속에 얼마나 많은 작전 구상이 들어있겠나? 여리고성 전투가 여호수아에게 얼마나 중요한 전투인가? 그런데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에게 두말없이 지휘권을 내어 드렸다.
자, 여기서 질문을 던져야 한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여리고성 공격작전은 진짜 엉성하고 형편없는 작적이었을까? 아니면 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고도의 작전이었을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성을 도는 장면을 자세히 보자. 여리고성을 돌았던 사람들은 일반 백성들이 아니라 무장한 군인들이었다.(3절) 행군대형을 보면 군인들이 완전무장을 하고 제일 앞에 나갔다. 그 뒤를 일곱명의 제사장이 나팔을 불고 따라갔다. 그 다음을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뒤따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본대가 완전무장을 하고 그 뒤를 따라갔다. 이 모습을 보면 여리고성을 그냥 산책하듯이 돈 것이 아니다. 공격대형을 갖추고 무력시위를 벌인 것이다. 7명의 제사장이 양각 나팔을 불었다고 한다. 양각 나팔은 양의 뿔로 만든 나팔인데 전쟁신호용이다. 나팔을 불었다는 것은 공격신호를 보냈다는 말이다.
여리고성 사람들은 이미 용기를 잃고 전의를 상실한 상태이다. 그런데 60만명의 군대가 완전 무장을 한 상태로 공격대형을 갖추고 나팔을 불고 성을 도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두렵겠나? 그런데 이스라엘 군대가 당장이라도 공격할 것처럼 하다가 그냥 돌아갔다. 이것을 6일 동안 반복했다고 생각해 보라. 잔뜩 긴장했다가 맥이 탁풀린다. 이것이 반복되면 등장할 때마다 공포감이 심겨진다. 나팔 소리만 들으면 공포심이 새겨진다. 마지막 날은 일곱 바퀴나 돌면서 나팔을 불어 댔으니 그 두려움이 극에 달했다. 바로 그 순간에 여호수아가 공격명령을 내려서 한꺼번에 함성을 지를 때 성벽이 무너져 내렸고, 적들이 완전히 굴복당했다.
보통 성을 점령하려면 아무리 뛰어난 군대라도 아군전력의 1/3 정도는 전력손실을 입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은 기가 막힌 전술로 이스라엘 군대를 여리고성으로 무혈입성 시키셨다.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의 생각을 보면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그 이상을 생각하시기 때문이다. 우리 머리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미리보고 준비하고 계신다. 앞서 가시고, 미리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여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따라갈 수 있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광야를 지나게 하시고, 요단강을 건너게 하신 사건은 모두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이 과정을 거치면 하나님을 알게 된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을 아는 단계로 들어간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단계로 들어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좀 무리한 명령을 해도 따를 수 있었다. 이것이 신앙이 성숙해 가는 모습이다.
하나님은 명령을 하실 때 반드시 약속을 함께 주신다. 약속 없는 명령은 하지 않으신다. 2절을 보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이미 여리고성을 주겠다고 먼저 약속하시고 명령을 내리셨다. 그럼 우리가 방법론을 가지고 논쟁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이미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방법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따를 수 있는 이유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약속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이루시는 분이시다. 만약 하나님이 2절의 약속 없이 3절-5절까지의 명령만 내렸다면, 우리는 그 방법이 여리고성을 정복하기 위한 정말 좋은 방법인지 아닌지를 판단을 해야 한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약속 없이 명령만 내리신적은 한번도 없다.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명령이 나오면 그 앞 뒤로는 반드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말했다고 약속이 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일방적으로 말한 것이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은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을 받아야 한다. 그 말씀을 내 약속으로 받았다면 그 말씀에 인생을 걸어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기 위한 위해서 기도하는 시간이 너무나 중요하다. 그리고 그 약속의 말씀이 이루어질 때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다리는 것이 믿음이다. 이런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고, 하나님과 사이에 신뢰가 쌓인다.
오늘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할 것이 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하려면 하나님의 방법대로 해야 한다. 10절을 보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하고." 하나님이 전군에 침묵 명령을 내리셨다. 이건 하나님이 사람들을 너무 잘 아시고 내리신 명령이다. 사람들은 이해가 되지 않으면 의심하고 불평한다. 40년 전 가데스 바네아에서 이스라엘이 패배한 이유다. 침묵하지 못해서다. 12명중에 10명의 정탐꾼이 각 지파로 가서 가나안 땅을 악평을 하고 두려움을 심었다. 밤새도록 불평하고, 두려워하고, 의심하게 만들어서 불신앙이 이스라엘을 삼켜버렸다.
지금 이스라엘 군인들이 얼마나 많은 말을 하고 싶었겠는가? “이건 뭐가 잘못되어도 한 참 잘못되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전략이냐? 이런 작전은 도저히 성공할 수 없다. 화끈하게 한판 붙어야지... 우리에게 싸우게 해달라.”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내 마음에 들지 않고, 내 생각과 다르고, 내 머리로 이해가 되지 않아도 의심하지 말고, 불평하지 말라는 말이다. 잠잠히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다리라는 말이다. 불평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다. 우리는 종종 너무 빨리 말을 해서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다.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 될텐데, 그걸 기다리지 못하고 내 마음속에 있는 말을 다 내 뱉어버린다.
잠잠하면서 뭘 하라고 하나? 나팔만 불게 했다. 여리고성을 도는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서 들려 온 유일한 소리는 나팔소리 뿐이었다. 나팔소리는 첫번째,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소리다. “2. 은 나팔 둘을 만들되 두들겨 만들어서 그것으로 회중을 소집하며 진영을 출발하게 할 것이라. 3. 나팔 두 개를 불 때에는 온 회중이 회막 문 앞에 모여서 네게로 나아올 것이요. 4. 하나만 불 때에는 이스라엘의 천부장 된 지휘관들이 모여서 네게로 나아올 것이며.”(민10:2-4) 전쟁터에서 작전을 지휘하는 하나님의 소리만 울리고 사람들의 소리는 잠잠해졌다. 하나님의 역사는 웅성웅성하는 사람들의 소리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람들의 소리가 가슴에 가득 담기면 화가 나고, 질투가 나고, 불평이 나온다. 그런데 하나님의 소리가 가슴에 담기면 평안해 진다. 우리 가슴속에서 우리의 영혼을 뒤덮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올 때 우리의 영혼이 살아나는 것이다. 우리가 사람들의 소리에 귀를 막고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 힘들 때마다 세상 소리에 귀를 닫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열어라.
두번째 나팔 소리는 하나님을 향한 기도다. "또 너희 땅에서 너희가 자기를 압박하는 대적을 치러 나갈 때에는 나팔을 크게 불지니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를 기억하고 너희를 너희의 대적에게서 구원하시리라."(민10:9) 불평과 불신앙의 소리가 잠잠해지고, 하나님의 향한 기도 소리만 울려퍼질 때 하나님이 역사를 일으키신다. 어려울 때마다 내 소리를 줄이고, 기도 소리를 내라. 고통스러울 때마다, 억울할 때마다 불평하는 소리, 부정적인 소리, 절망적인 소리를 내지 말고, 기도 소리를 내라. 그 소리를 듣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해주신다.
댄스는 두 사람의 호흡이 가장 중요하다. 그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리더를 하게 되어 있다. 두 사람이 최고의 댄스를 할 수 있는 방법은 리더 하는 사람을 믿고 자기 몸을 맡기도 따라가야 한다. 그래야 최고의 작품이 나온다. 내가 잘한다고 내 방식대로 하면 스텝이 꼬여서 넘어지게 된다. “Shall we dance?”라는 영화에 보면 이런 명문장이 나온다. “최고의 파트너는 춤을 잘 추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파트너가 넘어지지 않게 보호하는 것이 최고의 파트너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시고, 우리의 최고의 파트너가 되신다. 하나님은 나를 리더하시는 분이시고, 나의 지휘권을 갖고 계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이 리더하시는 대로 맡겨두면 하나님이 우리의 최고의 파트너가 되셔서 우리를 인도해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