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렬 교수는 서울대학교(B.M.), 서든침례신학대학원(The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영국 에딘버러대학교(University of Edinburgh)에서 수학했으며, 2010년부터 캔자스시티에 소재한 미드웨스턴침례신학대학원(Midwe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약학 교수로 목회자와 신학자를 양성하는 사역에 힘쓰고 있다. 복음서와 신약기독론 등 성서학 분야의 학문적 연구와 저술을 이어가는 한편, 목회자와 성도들을 위한 말씀 묵상 안내서를 저술하는 사역을 하고 있다.
[종려주일 2023년 4월 2일] 겸손하고 온유한 왕의 예루살렘 입성
읽을 본문: 마태복음 21:1–11
21: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1: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21: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21: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21: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21:6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21: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21:8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21: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21:11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말씀 해설과 묵상
오늘 본문 마태복음 21장 1~11절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을 생생하게 기록합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에서 특히 눈에 띄는 한 가지는, 그가 나귀를 타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구약 스가랴서 9장 9절 말씀의 성취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9:9)
스가랴 9장 9절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방식을 택하셨다는 것은, 그가 자신을 분명히 구약이 예언한 메시아와 왕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줍니다. 나아가 나귀를 타신 사건은 예수님의 온유함과 겸손함을 여실히 드러내 줍니다. 당시 나귀는 민간의 행보에 사용되었지(왕상1:33 참조) 군대의 행진에는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로마군대의 개선행진과 대조를 이룹니다(골2:14-15 참조).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사실은, 주님의 통치가 위에서 힘으로 강압하는 로마의 방식과 아무 관계가 없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통치 방식은 겸손히 낮아져서 자신을 내어 주기까지 자기 백성을 섬기는 것입니다(마 20:24-27). 주님의 십자가 대속 사건은 그런 겸손과 섬김의 통치 원리(grammar)를 결정적으로 계시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다니엘서 7장 14절에 따르면, “인자”이신 그리스도는 모든 이의 섬김을 받으셔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섬김을 받는 대신, 자기 목숨까지 다 내어 주는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 섬김의 궁극적 본을 우리에게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나귀를 타신 메시아 예수의 통치방식은 로마의 방식과 달라도 너무나 확연히 다릅니다. 또 로마를 해체하고자 하나 근본적으로 로마의 아류에 불과한, 다른 강압적 통치방식과도 선명히 대조됩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의 행렬에 동참했던 이들이 소리 높여 호산나(주: 본래 히브리어로 ‘하나님, 구원하소서!’란 의미를 지닌 찬양의 감탄)를 외칩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마21:9). 이같은 군중의 외침은 시편 118:26을 인용한 것으로,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그들의 임금을 환영하는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군중들의 외침은 사실 그들의 정치적 기대감을 투사하고 있습니다. 군중들은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 줄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군중이 자신을 향해 열광한다고 그에 호응하거나 그와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계속 십자가를 향한 그 여정을 묵묵히 이어 가십니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 서두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합니다(사40:3; 마3:3 참조). 그런데 주님의 길은 사실 십자가를 향하는 길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참 왕이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만왕의 왕이신 주님께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그의 겸손을 대면합니다. 예수님은 온유한 메시아요 평화를 가져오는 왕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 준, 사랑과 섬김의 주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베풀어 주신 그 사랑을 잊지 맙시다. 주님의 섬김의 본을 따라갑시다. 다양한 종교적 수사를 동원하여 ‘나는 겸손하고 온유한 예수님의 방식을 따른다!’고 제법 거창하게 선언했지만, 실은 세상의 방식을 더 따르고 의지했던 것에서 이제 돌이켜 주의 길을 따라갑시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4:17)라는 주님의 첫 선포를 기억합시다. 부흥은 다름 아니라 주께로 돌이키고 주님의 길로 돌이키는 것임을 잊지 맙시다.
한 줄 기도: 겸손한 메시아 예수님의 대속의 섬김을 깊이 묵상하고, 세상의 길이 아니라 주님의 길을 따르게 하소서.
--
*본 고난주간 묵상 가이드는 이충재 박사와 공저한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요단출판사, 2021)에서 필자가 저술한 내용 중 pp. 286-351 부분을 발췌하여 개정했다. 출판사 및 공저자의 허락 하에 이 책의 내용 일부를 재사용한다는 점을 밝힌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640322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