켄터키주 Asbury(에즈베리) 대학에서 일어난 부흥 사건이 교회와 기독교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반면에 이에 대한 말이 많았다. 감정만 고조시키는 일시적인 것은 아닌지, 바람직한 현상인지에 대해 말을 보탠다. 그러나 일어난 사실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아야 한다.
예수님의 변화산 사건은 신비 체험이었다. 예수님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앞에서 변하시고,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하셨다. 이 모습을 베드로가 보고 초막 셋을 짓고 살자 한다. 이 체험 자체를 부정하면 곤란하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통해 예수님이 드러나야 한다. 변화산 사건에서 그런 체험을 하고 나서 남은 것은 무엇이었는가? 오직 예수였다(마 17:8). 예수 외에는 보이지 않았다. 변화산 사건도 산 밑에서 일상의 삶이 매우 중요하다. 중요한 것은 산 위의 신비든, 산 밑의 일상이든 주님만 나타나야 한다.
찬송가 <내 맘의 주여 소망되소서> 가사가 예수만을 잘 드러내 준다. /내 맘의 주여 소망 되소서. 주 없이 모든 일 헛되어라. 밤에나 낮에나 주님 생각 잘 때나 깰 때 함께 하소서/지혜의 주여 말씀으로서 언제나 내 안에 계십소서. 주는 내 아버지 나는 아들 주안에 내가 늘 함께 하네/세상의 영광 나 안보여도 언제나 주님은 나의 기업 주님만 내 맘에 계시오니 영원한 주님 참 귀하셔라/영원한 주님 내 승리의 주 하늘의 기쁨을 주옵소서. 어떠한 고난이 닥쳐와도 만유의 주여 소망 되소서 아멘.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주여”라고 터져 나올 때가 있다. 하나님을 무의식적으로 찾는 탄식이다. 주님을 찾는 것만도 은혜다. 이 암울한 시대에 주님만이 우리의 소망 되기를 기도하자.
에즈베리 부흥 사건을 통해서도 남는 것은 오직 예수여야 한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만 보여야 한다. 그들이 체험한 부흥 사건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 체험을 통해 주님이 드러나면 되지 않은가. 그 체험으로 일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제자답게 복음을 삶으로 살아내면 되지 않은가.
다시금 부흥을 소망하고 부흥을 외쳐야 할 때다. 부흥 한 번 일으키지 못하면서 부흥이 일어난 곳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보태는 것은 분명 바리새적 태도일 것이다. 지금 교회는 하나님의 부흥 사건에 대해 관망자적 자세로 이렇다 저렇다 하는 해설자나 비평가가 아니라 그 부흥에 뛰어드는 헌신자가 필요하다.
차범근 감독이 축구 국가 대표 감독이었을 때, 경기 중 한국 선수가 골을 넣으면 앉아서 기도하셨다. 그것을 보고 당시 도올 김용옥이 비판 한 적이 있었다. 한 국가의 축구 감독이라면 자신의 신앙의 색깔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옳지 않다는 취지였던 것 같다. 그때 필자는 사역하던 중등부 예배에서 “머리는 있되 가슴이 없는 자여”라는 제목으로 설교한 적이 있다. 지금 일어나는 부흥 사건에 대해 비판만 한다면, 그는 진정 머리는 있되, 부흥의 가슴이 없는 자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인위적으로 부흥의 바람을 일으킨다고 일어나는가? 기도하러 모이자고 해서 모이는가? 다시금 기도의 무릎을 꿇자. 우리가 있는 공동체에서 부흥을 노래하자. 그것이 한국 교회를 살리는 길일 것이다.
찰스 다윈의 사촌인 프랜시스 골턴은 기도가 효과가 있는지 최초로 과학적으로 분석했다 한다. 기도를 받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도록 한 집단, 기도를 받지 않았고 그 사실을 모르도록 한 집단, 기도를 받았고 그 사실을 알도록 한 집단으로 나눠서 실험했다. 결론은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기도가 그런가. 기도의 무릎을 꿇고 기도 “체험”을 한 이는 기도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지 않은가. 기도하지 말라 해도 하지 않은가. 카페든 어디서든 홀로 조용히 두 손 모으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그를 위해 기도해 주게 된다. 그가 누구인지 모름에도 불구하고 기도의 은혜를 맛본 경험이 있다면, 그 기도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기에, 두 손을 모으게 된다. 그러면 그 자리가 교회 아닌가.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주님도 함께 있겠다’(마 18:20)는 말씀은 이런 상황을 두고 하신 말일 게다.
기도하는 이의 모습을 보면, 그래서 측은해 보이고, 그래서 울컥하고, 그래서 거룩해 보이고, 그래서 함께 잠시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으게 된다. 이것이 기도의 힘이요, 경건의 힘일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에 스며든다. 오늘도 두 손 모으고 기도하는 모든 이의 일상 가운데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가 있기를 소망한다. 하나님은 모든 곳에 임재하시지만, 그렇게 기도의 두 손을 모으고 두 눈을 감은 그곳에 특별히 임재하실 것이다.
두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은다는 것은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이 있음을 하나님께 아뢴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자신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기에 하나님께서 길을 인도해 주시라고 맡겨 드리는 포즈 같다. 자신의 두 손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하나님께 두 손을 드리니 하나님이 붙잡아 주시기를 바라는 포즈 같다. 마치 좌회전을 하거나 우회전을 하는 차량이 깜빡이를 계속 켜고 있는 것이 신호등 체계를 바꾸는 것은 아니지만, 운전자의 간절한 마음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듯, 기도도 그 마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예수님이 죽음을 앞두고 기도하셨을 때 “습관을 따라” 기도했고 “그 곳에 이르러” 기도하셨다. 늘 기도하던 곳에서 기도하셨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다(눅 22:39-41). 습관을 따라 늘 하던 대로 하셨다. 특정한 날만이 아니라 늘 하셨다. 천사가 나타나 힘을 북돋우어 드렸다. 예수께서 고뇌에 차서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핏방울같이 되어서 땅에 떨어졌다. 기도 후 제자들에게 가 보니 그들이 ‘슬픔에 지쳐서 잠들어’ 있었다. 그들에게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도록 일어나 기도하라’ 하신다(눅 22:42-46).
제자들을 향한 권면이지만 우리를 향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하나님께 구하자. 그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간구하자.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 81:10).
에즈베리 대학교의 부흥 현상은, 펜데믹을 거치면서 지친이들에게, 특히나 교회로 돌아오지 않은 이들이 많은 지금 이 시대에, 다시금 부흥을 소망하며 살라는 신호라 할 수 있다. 그 신호가 단순히 얼마 못 가 꺼지는 촛불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렇게 번져나간 사건을 통해 우리 일상에서 참된 주님의 제자로 살아야 할 것이다.
안경에 무엇이 묻었는데 눈을 아무리 비벼봤자 잘 보이지 않는다. 눈에 무엇이 묻었는데 안경을 아무리 잘 닦아 봤자 소용없다. 안경이 눈을 뭐라 할 수 없고, 눈이 안경 보고 뭐라 할 수 없다. 서로 한 몸처럼 도우며 지내야 한다. 성령 부흥 운동과 자신의 삶 속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눈과 안경처럼 함께 가야 한다. QT 아무리 많이 해도 삶 가운데 적용 점이 없다면 바른 말씀 묵상이 아니듯, 부흥체험도 교회와 일상, 즉 삶과 연결되어야 한다. 그러나 성령 부흥 운동 흐름이 극단적으로 가지 않은 이상 비판할 이유가 없다. 절망 가운데 불붙은 부흥의 불길이 우리 가운데도 옮겨붙기를 간절히 간구하자. 그리고 이제는 부흥을 위해 존재를 걸고 두 발로 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