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화), 웨슬리 신학대학원(Wesley Theological Seminary)에서는 아주 의미 있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서울의 광림교회에서 거액의 자금을 기부하여 ‘김선도 감독 석좌교수’(Bishop Sundo Kim Chair of World Christianity)를 세우는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첫 번째 김선도 석좌교수가 되는 영예를 얻은 사람은 인도 출신이며 하버드 대학교에서 학위를 마친 Sathianathan Clarke 박사입니다. ‘미국’ 신학대학원에 ‘한국’ 교회에서 기부금을 내어 ‘인도’ 출신의 교수를 세우는, 말 그대로 국제적인 축제의 사건이었습니다. 이같이 의미 깊은 일을 이룩한 광림교회 성도들에게, 미국에 사는 한 사람의 목사로서 마음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저는 이 행사에 참여하면서 마음속에 묻어 두었던 하나의 생각을 다시 꺼내어 만져 보았습니다. 제가 처음 공부했던 달라스 SMU의 퍼킨스 신학대학원에는 매년 ‘히스패닉 신학 주간’(A Week of Hispanic Theology)이라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남미에서 활동하는 신학자들과 미국에서 활동하는 남미 출신의 신학자들이 함께 모여, 학생들과 목회자들에게 공개 강연회도 하고, 축하 예배도 드리고, 신학 강연도 하는 축제였습니다. 제가 1년 동안 방문 교수로 있었던 뉴저지의 Drew University에도 그런 행사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행사를 볼 때마다, “왜 우리 한국 교회는 저런 일을 하지 못할까? 한국 교회에는 외국 교회에 보여줄 만한 것들이 많이 있는데, 왜 우리는 그것을 나누지 못할까?”라는 질문을 하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큰 교회 목회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의 ‘좁은 소견’을 탓했었습니다. 한국 교회들은 모두 자기만 알고, 자기 교회의 성장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점을 안타까이 생각했었습니다. ‘한국 영성 축제’(Festival of Korean Spirituality)같은 것을 신학대학원에 유치하여, 한국계 신학자들을 미국에 소개하고, 한국 교회의 전통과 영성을 보여 주며, 한국 신학자들의 연구를 장려하는 일에 나서줄 만한 식견 있는 목회자나 교회 지도자는 과연 없는지, 질문했었습니다.

이번 행사에 참여하면서, 그 때의 생각을 되새겨 보았습니다. 그 때 그 생각은 여전한데, 교수였던 제가 이제는 한 교회의 담임 목사로 옮겨 앉아 있었습니다. 문득, 이제는 “누구 나서 줄 사람 없소?”라고 두리번거릴 처지가 아니라, “이 일을 우리 교회가 할 수 없을까?”라고 생각해야 할 처지에 있음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자각과 함께 마음속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 마음 깊은 속에 저장되어 있던 이 생각이 정말 필요한 것이라면, 우리를 통해서라도 열매 맺게 하소서.”

얼마 전, 저는 ‘작은 교회, 큰 목회’를 지향하자는 호소를 한 적이 있습니다. 큰 목회란 내 교회의 필요만을 위해 목회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큰 목적을 위해 헌신하는 목회를 말합니다. 지금 당장의 필요를 위해서만 일하는 것이 아니라, 거시적인 미래를 보고 일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자기 앞 가림도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일에 참견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내 앞 가림을 잘 하도록 힘쓰는 동시에, 더 멀리, 더 널리 보고 생각하고 일하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큰 목회의 꿈이 하나씩 영글어 가기를 소원합니다. (2007년 10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