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군 양성소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한다. 그런데 이는 불법적인 일제의 만행이었다. 고종황제는 이 조약에 황제 인장(印章)을 찍은 바 없다. 이로인해 한반도 각지에서는 의병항쟁이 불 일듯 일어났다. 하지만 1911년 황해도 평산전투를 마지막으로 국내에서는 더 이상 의병활동이 어려워졌다. 국내에서 의병활동이 여려워지자 일부 의병장들은 부대를 거느리고 중국동북지역과 연해주로 이동하여 무장투쟁을 이어갔다. 연해주와 간도가 독립운동 항일무장투쟁의 중심지가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의병장들은 준비되어지만 독립군을 무장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항일무장투쟁을 위해 가장 시급한 일이었다. 이런 필요에 따라 1912년4월 이동녕과 이회영은 독립군 양성을 위한 '신흥무관강습소(新興武官講習所)'를 창설한다. 강습소는 1913년4월 '신흥학교'로 개칭되고, 1915년 다시 '양성중학(養成中學)'으로 개명되는데, 그 배움의 과정은 '4년 본과 과정'과 '3개월에서 6개월 단기 과정'으로 운영되었다. 연령으로는 18세부터 30세까지 젊은 인재들을 대상으로 했는데, 가르치는 과목은 다양했지만 군사교육을 가장 중요한 과목으로 많은 비중을 두어 교육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은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힘을 실어주었다. 이는 동북지역 항일무장투쟁의 명분을 제공했고, 이로 인해 독립군들은 더 적극적으로 무장투쟁에 참여했다. 1919년2월, 동북지역 39명의 독립운동가들은 '무오 독립선언서(戊午獨立宣言書)'를 발표하고, 여준, 김좌진, 박찬익, 조소앙, 정원택 등은 길림에서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를 창립한다. 그리고 상해, 연해주 지역에 대표를 파견하여 독립운동 공동전선을 구축했다. 동시에 조선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아 독립군 양성을 도왔다.
이런 적극적인 활동의 결과로, 1919년 중국 동북지역 각지 조선인 항일 단체는 무려 45개나 되었고, 참가인원은 8,450명에 달한다. 그 중 연변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쳤던 '간도국민회' 회원 수만 무려 3,000여명이 넘었다. 그리고 사령관 안무가 지휘하던 무장대원의 수가 무려 450여명이 넘는다.
항일투쟁 무대의 변화
'간도국민회'는 1919년 5월 '간도대한국민회'로 개칭한다. 그 산하에 '대동단(大同團)간도본부, 광복단, 충렬대, 맹호단, 철혈광복단, 대한청년회 등의 조직을 두었다. 그리고 1920년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위한 '국민회군'을 조직한다. 이들은 국민회 각 지방 소속 경위대 출신이며 소련에서 훈련받은 결사대 출신이었다.
일제는 1920년 4월, 연해주 신한촌을 급습해 독립군 색출작전을 펼쳤다. 이때의 참변으로 많은 무장 독립군 핵심인사들이 순국했고, 많은 한인들이 죽임을 당했다. 연해주 독립군기지가 더 이상 그 역할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데 '간도대한국민회'는 1920년 같은 해 5월 홍범도와 안무를 영입하여 지도력을 강화한다. 이로인해 독립군 항일무장투쟁은 끊기지 않고 간도를 중심으로 계속되어졌다. 뿐 아니라, 그 규모는 더 커지고, 군사력은 더 강화된다. 즉, '간도대한국민회'는 다른 항일무장부대와 연합하여 '북로독군부(北路督軍府)'를 결성하고 산하에 4개 대대 무장대를 편성했기 때문이다. 이제 일제 정규군과 전투를 해도 전혀 뒤지지 않는 전투력을 갖춘 명실상부 독립군 부대다.
'항일무장부대'의 전투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전투는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다. '봉오동 전투'는 홍범도장군의 '국민회부대'가 혼춘현 봉오동에서 1920년6월4일부터 6월7일까지 4일간 일본군 대대와 벌인 전투였다. 이는 연변 조선인의 항일부대가 연변 경내에 있는 일본 정규군과 벌인 전투 중 가장 큰 전투였고, 처음으로 대승을 거둔 전투였다.
이후 1920년 10월13일 '독립군', '국민회군', '신민단', '의민단' 등 각 항일부대는 홍범도장군을 사령관으로 세우고 연합부대를 창설하는데, 연합부대의 제1연대는 홍범도장군이 인솔하고, 제2연대는 김좌진장군이 인솔하기로 했다. 연합부대는 1920년 10월21일부터 26일까지 6일간 화룡성 삼도구 청산리 부근에서 일본군과 크게 전투를 벌인다. 이 전투가 바로 그 유명한 '청산리전투'다. 연합부대는 청산리전투에서 연변지역 조선인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다. 그리고 일본군을 크게 물리친다. 하지만, 이 전투가 화근이 되어 연변지역 조선인들은 크게 참변을 당한다.
한인들의 참변
청산리 전역에서 참패를 당한 일본군은 청산리 부근 1천여 호가 거주하는 마을로 진입하여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총살한다. 어떤 경우는 집에 가둔 채 불태워 죽이기도 했다. 심지어 손바닥에 구멍을 뚫고 쇠줄을 묶은 후, 그 쇠줄을 다시 코에 꿰어 10여 리를 끌고 다니다가 총살시킨 일도 있었다. 마을 사람들의 얼굴가죽을 모두 벗겨 두 눈을 뽑는 만행도 서슴치 않았다 한다. 연변지역 조선인들은 이렇게 '대한독립(大韓獨立)'을 위해 일제와 싸웠고, 고통당했고, 이렇게 죽어갔다.
일제는 조선인 항일무장단체와 격전을 벌이며 조선인 집거지를 토벌해 나간다. 결국 항일투쟁의 중심지는 연변에서 길림성 남부와 요녕성으로, 그리고 또 흑룡강성으로 옮겨지게 된다. 더욱 어려웠던 점은 일제가 반일(反日)운동 단체를 탄압한다는 구실로 군경을 파견해 압록강 건너편 요녕성 동남 일대를 침략하려하자 봉천 당국은 조선인을 중일(中日) 외교 분쟁의 화근으로 여겨 조선인 반일(反日)운동을 단속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0년 9월 17일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임정의 직속 군대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고 '항일무장투쟁'을 계속 이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