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S(Trinity In Society)연구소장 김종덕 목사
(Photo : 기독일보) TIS(Trinity In Society)연구소장 김종덕 목사

1905이후 1932년까지 중국 동북지역 조선인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한일합방으로 많은 의병과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동북지역으로 이주했다. 이와는 반대로,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제는 1907년 간도의 소속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간도 육도구(六道溝, 오늘날 용정시)에 '통감부 간도 파출소'를 설치하고 적극적인 조선인 이민정책을 편다. 한일합방 이전까지 해마다 만명 이상씩 간도지역으로 이주시켰다. 이는 중국대륙 진출의 야욕이 담긴 정책이었다.

일제는 1910년부터 1918년까지 '토지조사사업'을 행하는데, 이로 조선의 농민은 소작농으로 전락한다. 뿐만 아니라, 일본인 지주와 '동양척식회사'가 조선의 농민들을 체계적으로 착취하면서 많은 조선의 농민들이 만주로 이주하게 된다. 당시 일제와 일본 기업인들이 식민 개척사업을 위해 조선인의 저렴한 노동력을 필요로 했기에 돈을 벌기 위해 조선인들은 만주로 이주하기도 했다. 또한 천도교와 기독교 등 종교인으로서 종교활동의 자유나 민족 교육과 사업을 위해 이주한 사람들도 많았다. 이렇게 1905년 이후 만주지역으로 이주한 조선이들의 이유는 다양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 조사에 따르면, 1910년과 1911년 사이 두만강을 건너 간도로 이주한 조선인은 2만4천명이고,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이주한 조선인은 1만9천명이었다. 청조가 무너진 1912년 이후, 해마다 1만에서 2만명의 조선인들이 중국 동부지역으로 이주했다. 1910년부터 1920년까지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은 조선인의 수는 자그마치 19만2천5백명에 다다른다. 이렇게 지속적으로 찾아든 한인의 수가 1930년에는 약 60만명 정도였는데 그 중 64%가 연길, 화룡, 혼춘, 왕청 등 간도 일대에 거주한 조선인이었다.

타양살이 아픔

이 시기 간도(間島)일대 조선인의 생활은 중국 내외 혼란과 일제 간섭에 시달려 아주 어렵고 불안정 했다. 일본이 영토확장의 일환으로 조선인을 간도지방에 이주시키고 보호하는 정책을 취하지만, 청에 귀화하지 않은 조선인의 경우 문패(門牌)에 '임시거주자'라는 의미로 '기호(寄號)'라고 표시하게 했다. 토지소유권을 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미 개간된 토지마저 몰수했다. 탐관오리의 횡포를 피해 고향을 떠난 이들도 많았는데, 타향인 그곳에서도 청나라 탐관오리의 가렴잡세와 악세로 조선인들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였다. 자료에 의하면, 1924년에서 1929년 6년 사이 간도(間島)일대에 마적이 1,019차례 출몰했는데 마적에 의해 살해당하고 납치당하고 재산을 강탈 당하는 어려움을 겪으며 타양살이를 해야했다.  사랑하는 조국, 고향을 떠난 일도 마음 아픈데 그곳에서도 녹녹치 않은 삶을 살아야했던 '조선족 초기 디아스포라'들을 보면 마음 한구석이 짠해온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많은 조선인들은 청의 귀화요구를 거부하고 조선인으로 살아간다.

반일 애국교육

'을사늑약' 이후 이상설, 이동녕, 신채호는 망국(亡國) 원인을 교육의 부재(不在)로 인식하고 신식교육을 통해 '민족자주정신'과 '애국심'을 고양하려 중국동부지역에 학교를 건립한다. 동북지역 최초 신교육기관은 1906년 이상설과 여조현이 연변 연길현 용정촌에 세운 서전서숙(瑞甸書塾)이다.  역사, 지리, 수학, 국제공법, 헌법뿐만 아니라 철저하게 애국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민족주의 교육을 실시했다. 서전서숙은 1908년에 폐숙된다.

이후 김학연은 서전서숙의 교육이념을 계승하여 자신이 이미 1901년에 설립한 서당 규암재(圭岩齋)를 1909년 '명동학교'로 개명하고 신식교육을 시작한다. 명동학교는 중국동북지역, 연해주, 국내에까지 '민족교육과 독립운동의 본거지'라 잘 알려졌다. 명동학교는 이주 조선인에게 신문화를 소개하였고, 여성교육을 위해 명동학교 내 여학교를 병설하여 한국여성교육에도 큰 힘을 기울였다. 그 외에 동북지역에서 애국청년을 양성한 민족계열 교육기관으로 영신(永新)학교, 동창(東唱)학교, 정동서숙, 창동강습소, 한민학교, 광성강습소 등이 있었다. 특히, 윤상철은 1909년 신촌(新村)에 광성의숙(光成義塾)을 설립하는데, 1912년 기독교를 받아들여 '영신학교'로 개명한다.       

당시 기독교는 동북지역 민족의식 함양을 위한 교육에 크게 참여했다. 연변선교를 담당한 캐나다 장로회선교사 로버트리어슨(Robert Grierson)부부, 바커(A.H. Rarke), 후트(W.R. Foote)부부, 스코트(W.Scott) 등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이주 조선인의 독립운동을 지원해 주었다. 민족 운동가 이동휘는 기독교를 서양문명의 매개체로, 계몽 운동과 구국 운동의 수단으로 인식했다. 기독교계열 학교로는 '창동(昌東)소학교', '길동(吉洞)기독학당'이 있었다. 천주교계열 학교로는 광동학교, 흥동학교, 신흥학교, 상정여학교가 있었다.  

한양대학교 명예교수 임계순님이 인용한 통계에 의하면, 1916년 연변 4개 현에 설립된 각종 조선학교는 158개교 학생수는 3,879명이었다. 1920년 일제는 연변 대토벌 작전을 감행하며 각지의 조선인 운영학교를 불태웠다. 하지만 이후 많은 학교가 다시 설립되어 1922년에 165개교 학생수는 1,715명에 이르렀다. 1931년 중국동북 전지역에 항일 애국지사와 민중이 설립한 학교는 280여 개였고, 학생수는 7,070에 달한다. 이 중 종교 계통에서 설립한 학교는 108개교 학생수는 6,433명이었다. 학생 수를 비교해 볼때, 당시 종교계에서 끼친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 한 눈에 알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