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족상잔의 6.25남침 전쟁 이후 남과 북은 동일하게 전 국토와 산업 시설의 파괴와 황폐화로 굶주림과 피폐한 상황을 극복해야 했다. 이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남과 북은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었다. 김일성은 패전의 책임 전가와 정권 유지를 위한 처절한 권력 투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정적들을 제거하는 피의 숙청을 감행했으며, 초토화된 북한 지역의 산업 시설과 경제재건 등의 모든 분야의 정상화를 위해 사력을 다 해야 했다.
남한 역시 거의 전 국토의 산업시설의 파괴와 막대한 인명 손실과 요인들의 납북과 자진 월북으로 국가의 인재 공동화에 직면하게 되었다. 또한 용공 세력들의 척결도 간과할 수 없는 심각한 정치, 이념적 문제로 부상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대규모의 전쟁고아 대책과 식량 증산을 위한 다급한 문제들도 있었다.
북한은 중국과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의 경제 원조와 자국 내의 재건 운동을 통해 극복해나갔다. 물론 신앙의 자유는 공산화되는 과정에서 겪었던 것보다 더욱 옥죄어졌으며 비공식 은밀한 예배도 더욱 어렵게 되었다. 김일성은 전후 복구가 어느 정도 정리되자 1958년부터는 북한 땅에 기독교가 존립할 수 없도록 대대적인 숙청 작업을 실시하였다.
거기에 반해 남한은 미국의 식량 원조와 경제지원으로 전쟁의 잿더미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또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그리스도인이었고 헌법에 명시된 신앙의 자유를 보장함으로 이북에서 내려온 기독교인들도 교회 재건에 매진할 수 있어 남한의 교회는 크게 부흥될 수 있었다. 특히 남으로 피난 온 실향 이북 기독교인들은 천막 교회로 일어서기 시작하면서 전국에 우후죽순처럼 교회가 개척되었다. 이 당시 정권의 권력층들과 사회 지도층들이 대부분 이북 출신의 기독교인들이었던 점도 교회의 부흥 요인이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의 말기에 부정선거로 1960년 4.19 유혈 사태가 벌어지고 전국적으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면서 이승만 정권도 무너졌다. 그 혼란기에 1961년 5월 16일 군부의 군사혁명이 발생하여 군부 정권이 들어섰고 새로이 선출된 군 출신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면서 부정부패와 용공 주의자들의 척결을 과감히 단행하면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안정되어갔다. 특히 1965년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위한 대일청구권 배상금인 유무상의 8억 달러는 산업화 자금이 되어 발전의 마중물이 되었다.
1960년대에는 남과 북 사이에 체제와 경제와 국방 분야에 있어서 경쟁과 대립의 구도가 형성되었다. 여기에 북한의 김일성은 그의 경쟁적 통치자로서 두 번째로 등장한 박정희와 경쟁적, 대립적 관계가 되었다. 이 두 지도자는 거의 같은 시대의 인물이었다. 김일성은 1912년 평양 출신이었고 박정희는 1917년으로 경북 구미출신이었다. 이들은 공교롭게도 청년기의 군 시절을 만주에서 보냈다. 김일성은 항일운동으로 박정희는 일본 사관학교의 생도의 신분이었다.
이러한 한반도의 분립된 정치적 구도는 성경 속에 남북 왕조로 갈라진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과 남유다의 르호보암의 경쟁 구도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북 이스라엘 왕국은 에브라임지파를 비롯한 10지파와 넓은 영토와 토산물이 남유다보다 풍부하였다. 거기에 비해 남유다는 2개 지파에 불과했고 인구수도 적었으며 척박한 땅이 대부분이었다. 남한과 북한도 그와 비슷하였다. 이북 지역은 일제가 남겨놓은 각종 산업시설과 풍부한 지하자원과 전력 생산력이 높았기에 남한보다 산업적으로 매우 우세하였다.
그러나 남과 북의 경쟁 시대는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남한의 경제력이 월등히 북한을 앞서게 되었다. 이는 통치자의 리더십과 지식의 차이와 개방형 경제와 폐쇄형 경제의 차이였고, 특히 남한의 시장 경제 체제와 사유재산 제도와는 달리 북한은 재산의 국유화와 계획경제와 군수산업 분야의 치중으로 인하여 결과적으로 남한의 경제에서 뒤쳐져 점차 그 경쟁 차이는 더욱 벌어졌고 국민의 소득 차는 비교 불가가 되었다. 남한의 경제 발전은 교회의 성장과 부흥으로도 이어져 놀라울 정도로 그 상승곡선을 이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경제 개혁을 혁신하지 않았고 체제 유지에 국력을 소진하였다. 북한과 남한과의 경쟁 관계 초기에 북한이 산업 시설의 우월성을 유지하지 못한 것은 통제 경제와 내수적 경제에만 몰입한 반면에 남한의 경제는 대외적으로 수출 경제와 해외 자본과 기술을 도입으로 경제의 자립을 일찍이 수립하게 되었고 자생적, 지속적 발전의 힘을 축적하게 되어 성장의 상승을 이어가면서 오늘의 선진 산업국으로 나가게 되었다. 교회도 역시 세계에서 가장 급성장하며 전 인구의 25%가 기독교인이 되었고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세계선교에 교회 역량을 쏟아 선교지에서 선교국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는 선교 국가로 급부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