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지금까지 추모사를 3번을 씁니다. 저희 아버님이 천국에 입성하셨을 때와 우리교회 신 부자 집사님이 주님 품에 안기셨을 때, 그리고 오늘 김 인민 권사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을 때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김 인민 권사님이 누구신가? 생소한 이름이라 생각하실 것입니다.
이분은 저의 이민목회를 있게 하신 분이시고, 저희 가족 4식구를 미국에 살게 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딸을 타 코마 시장에 이어, 연방의 한인 하원의원으로 세우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지난 6월 8일 새벽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편안하게 하늘나라로 떠나셨다는 비보이었습니다. 자주 찾아뵙지 못한 아쉬움과 육적인 헤어짐이 많이 슬펐습니다.
권사님은 1960년 초에 한국에서 미군이셨던 남편 월리 스트릭 랜드씨와 결혼해 1962년 서울에서 지금의 딸인 스트릭 랜드 의원을 낳고, 딸이 5살 되던 1967년 미국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권사님의 인생의 시련은 남편이신 스트릭 랜드씨가 쓰러지심으로 시작 되었습니다.
의사의 진단으로 1년 정도밖에 살지 못한다는 남편을 정성스런 간호와 보살핌으로 무려 18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남편을 살게 해주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따님이신 스트릭 랜드 의원을 위해서 학교 옆으로 집을 준비하시어 따님이 공부를 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맹모삼천지교를 실행하신 분이십니다. 이를 알고 있는 스트릭랜드 의원도 어머님에 대한 각별함이 있었습니다.
권사님은 제가 심방을 할 때마다, 목사님 이렇게 작은 교회에 오셔서 고생하시는데, 어서 한국에 섬기시던 교회로 가라 종용을 하셨고, 미국에서 갈 교회가 있다면, 큰 교회로 가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제가 시애틀 영광교회로 간다고 했을 때 권사님은 큰 교회로 가시는 줄 알고 금방 허락을 해 주셨는데, 후에 본교회보다 작은 교회로 가셨다고 안타까워하시며 저희를 뵐 때 마다, 봉투도 손에 쥐어주시고, 갈비도, 만두도 친히 준비해 두셨다가 빈손으로 보내시지 않으신 참으로 잊을 수 없이 귀한 권사님이셨습니다. 일찍이 심장 수술을 받으시어 원래 몸이 약하시고 불편하심에도 새벽을 깨워 항상 같이 기도 하셨던 모습이 선합니다.
권사님은 처음 뵐 때 5년은 더 살 수 있으면 하셨는데 18년은 더 사셨습니다. 저는 권사님을 하나님 품에 보내며 추모하는 마음으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 는 말씀을 권사님을 추모 하면서 묵상하게 됩니다. 언어가 운명을 바꾼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변화는 하나님의 언어가 나의 내면에 들어와 거할 때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품은 언어로 생각하고 전달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권사님은 저와 5년 반을 함께 신앙생활을 하시며, 순종과 신뢰로 말씀이 육신이 되시고, 진리가 되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사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분이 주님 품에 안기셨습니다. 주님 품안에서 평안히 영면하시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