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반신앙적인 사회 여건
지난 세대에 전 세계에 가장 많은 신학자를 배출하고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며 가장 강력한 기독교 국가로 알려졌던 영국이 오늘 날에는 무슬림들이 훨씬 더 많아지고 있어서 전에 건축한 거대한 예배당의 다수가 결혼식장이나 식당과 카페, 또는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고 있는 실정이다. 주일마다 성도가 넘치고 찬송이 울려 퍼지던 예배당들이 이제는 극소수의 노인들만 둘러앉아 있어서 마치 오래 된 박물관처럼 보이는데 반하여 인근의 이슬람 사원에서는 무슬림들이 차고 넘쳐서 건물 밖에까지 나와 바닥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본다. 일부 교회는 건물 유지가 어려워서 헌금을 "간청"하는 안내문을 현관문에 붙여 놓은 것을 보았고 예배당 일부 또는 전부를 무슬림들에게 대여하고 있다. 런던 시내에 있는 어느 상당히 크게 지은 예배당이 지금은 록앤롤 콘서트장이 되었다.
영국의 웨일즈 지방에 가면 하노버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는 한국에 초기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이다. 즉 젊은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했지만 그는 27 세에 평양에서 순교 당했다. 그 교회도 다른 교회처럼 문을 닫을 뻔 했지만 한국 교회들이 토마스 선교사의 희생을 잊지 않고 매년 많은 성도들이 방문하여 헌금함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예배당의 사방 뜰은 이미 교인들의 묘지로 변해서 주차할 자리가 마땅치 않았는데 내가 설교할 기회가 있어서 참여했다. 그런데 안내자가 내게 귀띔하기를 설교를 15 분 이내로 짧게 하라는 것이다. 이 교회에는 아직까지도 담임 목사가 없어서 평신도가 예배를 인도하고 있는 실정이다.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의 한국어 통역자로 참가하여 독일의 에센이라는 도시에 간 적이 있다. 시간이 나서 도시를 돌아보는데 그곳에서 사역하는 어느 선교사의 안내로 거대한 예배당을 가 본 적이 있다. 예배당은 도시 가운데서 가장 교통이 편리한 곳에 위치해 있고 건물이 웅장했다. 그런데 정문이 굳게 닫혀 있어서 옆의 작은 문을 통해서 내부로 들어가 보았다. 어두컴컴한 본당에 몇 명의 사람들이 조용히 앉아 있는데 분위기가 너무 썰렁했다. 예배당은 크지만 마치 수 백 년이 넘은 성곽과도 같고 을씨년스러워서 나는 곧장 밖으로 나왔다. 독일 현지인 목회자의 말에 의하면 독일인들의 대다수가 기독교인을 자처하여 신상 명세서에는 기독교인이라고 표시하지만 실제로 주일에 예배당에 나오는 사람들은 약 5 퍼센트 정도일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이런 현상은 비단 영국과 독일의 경우만이 아니며 미국도 심각한 상황이다. 일부 초대형 교회가 활발하게 사역하고 있지만 많은 중소형 교회들이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얼마 전 캐나다의 퀘백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숙소 건너편에 대리석으로 건축된 대형 예배당이 보여서 일부러 찾아가 보았다. 그런데 그곳은 예배당이 아니라 고서적을 파는 책방으로 변해 있었다. 어느 예배당은 실내 장식이 화려하고 모자이크 창문의 무늬가 아름다워서 젊은이들에게 인기 있는 카페가 되었다. 예수의 재림의 시기가 가까울수록 세상은 더욱 악하고 반하나님적인 방향으로 갈 것이다.
세상은 성도에 대해서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 인권이라는 이름과 평등이라는 주장으로 악한 사상을 법제화하고 준수할 것을 강요당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서 동성애는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성정체성 또는 "성소수자"라는 이름으로 보호를 받지만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은 인종차별주의자라거나 증오 범죄의 타깃이 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것에 대해서 아주 분명하고 단호하게 정죄하고 있다. 또한 인권과 평등의 이름으로 기독교의 전도를 법적으로 막는 나라들도 있다. 죄를 죄라고 말하면 불법이 되기도 하는 이상한 세상이 되었다.
5) 강한 육신의 저항
성도의 영적인 삶에 대항하는 대적자는 크게 세 가지로 본다. 즉 사탄과 세상과 육신이다. 그 가운데 육신은 영성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우리의 신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다만 영적인 측면에서 우리를 대적하는 세력이다. 신체가 크고 건장해도 그것을 잘 통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신체는 약하고 왜소해도 그 육신의 욕구가 강하여 늘 갈등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육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영적인 어떤 힘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 가운데 가장 깊은 영성과 강력한 능력을 소유한 전도자이지만 자신의 육신과의 싸움에 대하여 솔직한 고백을 한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롬 7:18-19). 즉 그는 영적으로 성숙한 전도자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의 육신과 싸우는 것이다.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지만 실제 삶에서는 원치 않는 말과 행동을 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삶을 사는 자신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만 아니라 믿음이 성장한 사람도 결코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실 우리는 모두 영성과 육신을 매일 오가면서 갈등하고 고민하고 기도한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의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갈 5:19-21).
모든 성도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이러한 육체를 지니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육신과의 갈등을 온전히 벗을 자가 없을 것이다. 사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영혼의 구원이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벧전 1:9). 어느 때에는 가장 경건하고 거룩한 생각과 말을 하다가도 또 어느 때에는 경건치 않고 육신적인 생각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육체는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홀연히 변화하여 새 몸을 입을 것이다.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고전 15:52). 그렇기 때문에 항상 성령의 충만을 간구하고 그의 능력으로 수 많은 유혹과 죄를 이기고 자신을 통제해야 한다. 우리가 사는 현실은 낙원이 아니라 왜곡되고 오염된 세상인 것을 잊지 말고 항상 깨어 순간 순간 주님과 동행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