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로스 선교사의 네 가지 면
1. 만주와 한국 선교 개척한 열정적 목회 선교사
2. 역사·선교 등 저서 7권 이상 출판 학자 선교사
3. 첫 한글 신약전서를 완역한 성서 번역 선교사
4. 널리 사용된 주석서 여럿 쓴 성서 주석 선교사
'존 로스의 한글 성경 번역이 한국교회와 사회문화에 끼친 영향과 과제'라는 주제의 학술 심포지엄이 4월 26일 오후 서울 신문로 새문안교회(담임 이상학 목사) 언더우드홀에서 개최됐다.
존 로스(John Ross, 1842-1915) 선교사는 140년 전인 1882년 3월 쪽복음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를 출간했으며, 이는 한국에서 첫 출간된 한글 성경이다. 그는 그해 5월 <예수셩교 요안니복음젼셔(요한복음)>도 발간했으며, 첫 쪽복음 출간 5년 만인 1887년 신약전서인 <예수셩교젼셔> 한글 번역을 완성했다.
존 로스는 1872-1910년 스코틀랜드연합장로교회 해외선교부 만주선교회 첫 선교사로 38년간 봉사했다. 한국에는 1887년 9월 서울을 한 차례 방문했지만, 한국 개신교의 출발과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소장 한규무 교수)와 대한성서공회 주관으로 열린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이재근 교수(한국기독교역사학회 회장) 사회로 옥성득 교수(UCLA)가 '존 로스와 한국 개신교: 로스의 첫 한글 복음서 출판 140주년에 부쳐'라는 주제의 기조발제를 했다.
옥성득 교수는 "한국 개신교 역사의 첫 장에 등장하는 존 로스 선교사에게는 ①만주와 한국 선교를 개척한 열정적 목회 선교사 ②선교 방법론, 타종교 신학, 한국어, 한국사, 중국사 관련 저서만 7권 이상 출판한 학자 선교사 ③10년 만에 첫 한글 신약전서를 완역 발행한 천재적 성서 번역 선교사 ④한국에서도 널리 사용된 여러 권의 주석서를 쓴 성서 주석 선교사 등 네 가지 면이 있다"며, 특히 성서 번역자로서의 로스에 대해 상세히 소개했다.
옥 교수는 "조선 정부의 쇄국정책으로 한반도 안에 들어가서 전도할 수 없었던 로스는 1877년 한글 성경 번역을 시작해 1882년 쪽복음부터 1887년 신약전서까지 완간하고 한국인 권서를 통해 반포함으로써 미래 선교 사역을 준비하는 차선책을 선택했다"며 "만주에서 장사하는 한국 상인 가운데 한문에 능한 자를 고용하여 번역하게 하고, 선양에 문광서원을 설치해 상하이와 요코하마에서 주조한 한글 자모로 인쇄하고 출판했다. 본토 말로 번역된 성경 자체의 능력과 토착인에 의한 자전을 신뢰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옥성득 교수. ⓒDB |
그는 "초벌 번역을 하고 첫 복음서를 출판한 후 신약 전체 출판으로 넘어가는 과정이 오래 걸렸기 때문에, 로스는 누가·요한복음을 먼저 출판해 반응을 살핀 후 수정 작업을 하면서 단권이나 합권을 발간하다 1887년 신약전서를 출판했다"며 "준비기인 제1기(1876-1877) 로스는 한국어를 배우면서 문법을 정리하고, 한국어 회화서를 발간하고, 실험적 소책자 번역을 하면서 어휘집을 만들고 적절한 성경 용어를 선택하면서 복음서 일부를 실험적으로 번역했다. 한국인 번역자는 이응찬이었다"고 설명했다.
제2기는 초역기로, 1877년부터 로스가 첫 안식년 휴가를 떠난 1879년 4월 10일까지다. 로스는 이응찬·서상륜·백홍준 등에게 한문 문리본(文理本) 신약전서를 저본으로 주고 마태복음부터 로마서까지 초역하도록 했다. 로고는 이 초고를 들고 스코틀랜드성서공회에 찾아가 한글 복음서 출판비를 지원받았다.
제3기는 1879년 4월부터 1881년 8월까지로, 로스가 스코틀랜드에 있을 때 잉코우의 매킨타이어가 신약 전체 초고를 완성한 때다. 매킨타이어는 이응찬에게 한국어를 배우면서 신약 전체 번역 초고를 만들었고, 1880년 조선 정부의 언해본을 참고하면서 번역을 검토했다. 1881년에는 이응찬과 최성균 등 번역 조사에게 그리스어 본문의 뜻을 풀이해 주면서 수정을 거쳤다. 이와 함께 매킨타이어는 1879년 4명의 한국인에게 세례를 주고 이들의 훈련을 위해 <예수셩교문답>과 <예수셩교요령>을 번역시켰다.
제4기는 안식년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로스가 만주에 문광서원을 설치하고, 1881년 9월부터 1882년 봄 초고를 수정해 첫 복음서인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출판한 때다. 로스는 지난 5년간 여러 차례 수정한 초벌 원고를 놓고 조사들과 최종 본문을 확정하고, 1881년 말 인쇄에 들어갔다. 먼저 매킨타이어 초역의 소책자 <예수셩교문답>과 <예수셩교요령>을 다듬어 출판하고, 두 복음서를 1882년 3월과 5월 펴냈다. 이 과정에서 서울 출신 학자가 참여해 의주말을 서울말로 고쳤다.
마지막으로 신약 완역기인 제5기는 1882년 여름부터 선양에서 신약전서 <예수셩교젼서>를 완역한 1886년 가을까지이다. 출판한 두 복음서를 수정하면서, 나머지 복음서와 서신서를 번역하고 출판을 병행했다. 1883년 사도행전까지 최종 원고를 완성했고 1884년부터 서신서 번역에 돌입해 1886년 가을 요한계시록까지 번역했다.
▲미국에서 사전 녹화로 옥성득 교수가 발표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
로스의 번역 원칙은 ①저본(초고, 기본 텍스트)은 한문 문리본, 영어 개역본(1881)로 하되, 본문의 최종 권위는 옥스퍼드대학교가 펴낸 새로운 본문 비평판 그리스어 신약전서(1881)로 했다 ②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민중어를 사용하고, 되도록 한자어가 아닌 고유 한국어를 사용한다 ③직역을 원칙으로 하되 한국어답게 하고, 한국어 관용어구를 존중한다 ④동아시아인의 종교성을 존중한다 ⑤평안도 방언으로 초벌을 했으나, 서울말로 수정한다 ⑥생소한 용어는 음역한다 등이었다.
옥성득 교수는 "②의 원칙에 따라 '태초'는 처음, '독생자'는 외아들, '유월절'을 넘는절, '의인'은 옳은 자, '예언'은 미리말함, '기도하다'는 빌다 등으로 했고, 상제 대신 하나님(하느님)을 사용했다"며 "④에 의해 요한복음 1장 1절의 로고스를 유불선 세 종교가 추구해 온 도(道)로 번역했고, ③에 의해 '바늘 눈' 대신 바늘 귀로 썼다"고 설명했다.
번역 방법은 ①한국인 제1번역자가 한문 문리본에서 초역 ②로스가 그리스어 성경 참고하면서 이응찬과 2차 번역 ③제1번역자가 정서 ④로스와 이응찬 수정 ⑤로스가 그리스어 신약, 성구사전, 메이어 주석을 참고하면서 어휘 대조 통일해 최종 원고를 작성하고 식자공에게 넘겨 인쇄 순이었다.
옥 교수는 "로스의 예상대로 첫 한글 복음서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일을 행하셨다. 선양 문양서원 식자공 김청송은 목판에 글자를 식자하면서 그 말씀을 마음판에 새겨, 한국 개신교 다섯 번째 세례교인이 됐다"며 "그는 이 첫 복음서를 들고 서간도 한인촌에 첫 전도인으로 파송됐고, 그의 전도 결과 1884-1885년 100명이 로스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밝혔다.
그는 "서상륜은 1883년 봄 여섯 번째 개종자로 선양(봉천)에서 로스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가을에 영국성서공회 첫 권서로 한국에 파송돼 의주를 거쳐 서울까지 걸어서 전도한 결과 1884년 수십 명의 구도자를 얻었고, 소래에서는 동생 서경조와 첫 교회를 세우고 정기 주일예배를 드렸다"며 "또 백홍준 등은 의주에서 전도하면서 1884년 설교당을 열었다. 이처럼 외국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 의주 청년들의 봇짐을 통해 복음서가 한국인의 손에 들어갔고 첫 신앙 공동체들이 세워졌다"고 전했다.
또 "기독교는 번역의 종교다. 이슬람교가 거룩한 아랍어로 된 꾸란 번역을 엄격히 금지하는 근본주의를 고수하는 반면, 하나님 말씀인 성경은 한 지역의 본토 말로 번역되는 번역성, 곧 성육신을 선교의 제1원리로 삼았다"며 "예수는 한 지역의 말과 문화로 번역되면서 그들의 살과 피가 되는 동시에, 인간의 죄악성에 도전하는 거룩한 언어와 대안 문화를 창출한다. 다양한 문화의 옷을 입은 '번역된 예수'의 모습들이 모여 종말의 우주적 그리스도가 완성돼 간다"고 서술했다.
▲심포지엄 장소인 새문안교회에 첫 번역 성경들을 전시한 모습. ⓒ이대웅 기자 |
옥성득 교수는 "존 로스 목사는 1910년 은퇴하고 본국으로 돌아갔으나, 시차로 인해 1910년 에든버러 세계선교사대회에 참석하지는 못했다"며 "대신 그에게 주어진 선교 방법과 복음화 방안에 대한 설문에서, '선교사의 극소화와 본토인의 극대화'가 세계 선교의 해답이라고 제시했다. 방대한 중국과 선교의 문이 활짝 열렸으나 일본의 식민지가 된 한국을 바라보면서, 로스는 삼자 원리에 입각한 토착 교회만이 성장하고 핍박 속에서도 견딜 수 있다고 믿었다"고 말했다.
옥 교수는 "삼자 원리를 배우고 실천하는 기초에 성경을 읽고 전하는 본토인 신자가 있었기에, 그는 성경을 번역하고 출판하고 반포했으며 성경 주석을 썼다"며 "그가 한국에 준 최초의 한글 복음서와 신약전서는 한국 문화와 기독교에 영원한 금자탑으로 남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로스는 만주와 조선의 영혼을 사랑하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38년을 인내하며 전도자의 아름다운 발을 가진 개척 선교사로서 한국 개신교회의 첫 신자들을 만들었다"며 "그는 중국과 조선의 언어·역사·풍속·문화를 깊이 연구한 선교학자였다. 서구 기독교를 이식하는 문화 제국주의 대신, 전통 종교문화의 선한 요소를 기독교의 접촉점으로 수용하는 성취론을 지지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비록 전통 종교들이 아골 골짜기의 해골처럼 말랐으나, 성령의 바람이 불면 살아날 것을 믿었다. 비록 중국인과 한국인이 사마리아 여인처럼 과거에 여러 종교를 섬겼으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배에서 생수가 흐를 것을 소망했다"며 "한 겨리의 소가 함께 밭을 갈듯이, 그는 유교와 기독교가 동아시아인의 도덕성과 영성의 밭을 가는 동역자라고 믿었다. 그는 무엇보다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을 번역하고 성경을 주석한 성서의 사람이었다"고 덧붙였다.
▲윤경로 이사장(오른쪽)이 개회사를 전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
심포지엄에서는 이후 유경민 교수(전주대)가 '역대 한국어 성경 번역문 대비를 통한 로스 번역의 언어·문화적 특징 연구', 박형신 교수(남서울대)가 '로스역 한글 성경의 보급과 현재 소장본에 대한 연구', 이두희 부총무(대한성서공회)가 '로스의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가 한글 성경 번역에 끼친 영향과 앞으로의 과제: 누가복음 20-24장을 중심으로'를 각각 발표했다.
민현식 박사(서울대 명예교수), 류대영 교수(한동대), 이환진 교수(감신대)는 각각 논찬했으며, 연구소장 한규무 교수(광주대)를 좌장으로 토론이 이어졌다. 앞서 이상학 목사는 개회기도, 연구소 윤경로 이사장은 개회사, 권의현 사장(대한성서공회)은 환영사, 권재일 회장(한글학회)은 축사를 각각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