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 신복음주의' 에 대한 단상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과의 뚜렷한 선 긋기가 필요했던 개혁교회들은 '복음주의(Evangelicalism)'의 기치 아래 뚜렷한 성경적 정체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선제적 토대를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A. McGrath). 곧, 하나님의 말씀보다 인간 중심적 가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던 중세교회의 우위를 '오직 말씀과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앞세우는 복음주의의 상징적 슬로건이기도 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 복음주의는 근본주의(Radicalism)와 자유주의 신학, 그리고 이 두 부류의 편향성을 반성하며 포용적인 태도를 보인 '신복음주의(Neo Evangelism)'의 등장이었다. 이들은 자유주의 또는 자유주의화 된 교회와 타협의 접촉점을 찾으려고 무던 애를 썼고 아직도 문화적-기독교화하는데 선두 주자가 되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비신자들에게 매력을 끌 만한 기독교, 즉 몰 가치화, 동성애, 방종적인 자유를 수용하는 것들이 온라인 시대에 더 이상 숨을 수 없는 처지에 있으며, 이는 단순 교리적 문제가 아니라 진짜와 가짜를 구분해야만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복음주의, 시대 앞에 겸손해야.,
복음주의는 성장의 기세가 약화되지 않고, 그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고 하는가? 한마디로 초심을 잃었다. 바울은 사도행전에서 교회의 안팎에 대한 공격과 그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는바(행20), 밖으로부터의 공격도 주의해야 하지만 내부로부터의 분열 작전은 교회의 근간을 해체시킬 수 있는 더 위험하고 첨예한 갈등을 유발할 수 있는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행 20:29-30).
미국의 저명한 신학자 데이턴 (D. W. Dayton)은 '복음주의'가 현대 신학에서 유용하지 않다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근본주의의 고립과 자유주의의 폭망(?)의 반작용으로 비주류 변방에 있던 복음주의가 수직적으로 성장함과 동시에 그 정체성이 모호해졌기 때문이다.
신복음주의 자화자찬 할때인가.,
근본주의자들을 혹평한 가운데 신복음주의의 기치는 사회적 문제에 깊게 관여하며, 개인 구원과 함께 그의 사회과학적 철학을 포함할 것이라고 선포하는 데까지 확장되었고 순수한 의도마저 의심된 지 오래다. 빌리 그래함과 존 스토트의 주도로 체결된 로잔언약(1974)은 국가와 일정 거리를 두고 견제해야 하는 교회의 위치를 활발한 (정치) 사회참여의 정당성을 부여했다는 것에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개인적 정서 또는 사회참여라는 공공선을 강조하면서 사실상 성경적 교리를 굳건하게 지키는 것보다 포퓰리즘(populism)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신자와 불신자를 대동 연합하는 종교 대통합 운동은 중세교회의 차별성을 둔 종교 개혁적 가치와는 달리 가톨릭까지 아우르는 대범함을 보이고 있다.
<한국적 신복음주의?> 예수님에게 통할까?
최근 한국의 간판급 교회의 목사가 한국적 신복음주의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그가 내어놓은 한국교회를 위한 제언들이 자칫 새로운 만병통치약처럼 보이지만 복음이 이리도 애매 모호한 형태를 가진 것 인가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거대한 시대적 도전 앞에 복음적 연대가 과연 하나님 나라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일인가? 그랬다면 예수님은 당시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일찌감치 연대했어야 할 일이었다. 말씀의 순수성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오롯이 지켜 내고야 말겠다는 인간 중심의 개혁적 가치가 과연 하나님 앞에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복음이 공공성(선)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상 당연한 일이지만 포용과 연대를 위해 진리의 절대성까지 침해하는 것은 목적과 수단이 바뀐 것이다.
존 스토토(J. Stott) 목사가 '영원한 형벌' 대신에 '영원한 분리'라는 문구로 대체한 이유에 대해서도 그의 지적인 자랑으로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표면적인 기독교가 부자 되기를 동요하고, 사회적 지위가 높아진 많은 가짜들로 인해 교회가 성경적으로 회개하는데 어려워지고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복음을 희석하고, 죄를 말하지 않으며, 긍정적인 메시지로 위로만 하려고 애쓰는 피상적이고 저급한 기독교가 버젓이 존재하는 시대다. 오늘날 '복음주의'의 이름을 가지고 행하는 '비복음주의'의 행태는 차라리 "반복음주의(anti-Evangelicalism)로 그 정체성 마저 애매해진다.
적잖은 현대 신학자들이 교회의 담을 낮춰야 한다거나 심지어 교회의 담을 모두 헐어버려야 교회가 산다고 주장하는 시대에 우리는 산다. 교회와 세상과 구분이 가지 않을만큼 종교다원주의 시대를 주창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둠과 죄악 가운데 오히려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심'의 능력으로 함몰된 영혼을 깨우는 사명을 감당케 하신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창한 목사, 휴스턴 늘푸른교회 담임, 휴스턴 기독일보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