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사도행전 7:59-60)".
스데반의 순교는 교회사에 있어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이는 과거의 낡은 사고방식을 떨치고, 보편적이고 영원하며 영적인 하나님의 교회로서 성전과 예루살렘을 벗어나 사마리아와 이방, 땅 끝까지 그 영향력을 떨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스데반은 순교 도중 예수님께서 십자가 형틀에 달리실 때 하셨던 일곱 가지 말씀 중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죽어가면서도 자기를 핍박하는 이들을 위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순교 정신은 2,000년이 지난 우리 신앙인들을 위한 외침이 아닐까요? 스데반, 그는 이 시대의 작은 예수님이 아닐까요?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세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사도행전 7:55-58)".
스데반(Stephen)이라는 이름은 '면류관'을 의미하며, 예루살렘 최초의 집사로서 첫 번째 순교자이기도 합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뛰어넘은 능력 있는 설교자이며, 신앙심이 돈독했고 은혜가 충만하고 능력 또한 많았습니다. 성경 지식이 해박했으며, 지혜가 풍부하고 용기가 넘쳤으며, 사랑이 많은 자였습니다.
초대교회가 부흥되면서 제자들이 해야 할 일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 다른 일 때문에 시간을 많이 빼앗기고 있었습니다.
이에 사도들은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기 위해 교회의 집사를 선출하기로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성령이 충만한 사람 일곱을 선택하여 교회의 일을 맡기기로 했습니다.
그 일곱 집사로 스데반, 빌립,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베나, 니골라가 선택됐습니다. 스데반은 비록 집사의 직분이었지만 성령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행했습니다.
그가 복음을 열심히 전파할 때 많은 사람들이 일어나 대적했지만, 스데반의 설교에 어느 누구도 당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의 감동으로 설교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오순절에는 3천 명이 회개하며 구원을 얻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고(사도행전 2:4) 앉은뱅이를 고친 후 제자들의 수가 5천명이나 되었던 것입니다(사도행전 4:4). 교회에 대한 핍박은 있었으나, 구원받는 자의 수는 오히려 날마다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열심히 최선을 다해 유대인들 앞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주의자들은 스데반 집사가 전하는 복음을 미워했습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은 스데반 집사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마음에 찔려 이를 갈기도 했습니다.
결국 스데반이 전하는 복음의 말씀에 잔뜩 화가 난 군중들은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고 말았습니다. 마침 그 앞에는 예수를 핍박했던 사울도 있었습니다.
본문에서 기독교 최초로 순교당한 스데반은 당시 권력에 의해 정죄되었고, 율법에 의거하여 신성모독자로 정죄당해 돌로 쳐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사나운 군중들은 폭력으로 그를 살해한 것이 아니고, 관례적인 사형 집행 형식을 따라 그를 돌로 쳐 죽였던 것입니다.
그는 시에서 끌려나왔고, 증인들이 손을 그에게 얹었습니다. 본문에서 스데반은 적들과 박해자들에게 말할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을 당했지만, 스데반의 영혼은 놀랄만한 예수님의 죽음의 모델로서 예수님을 닮은 평정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순교란 말처럼 그리 쉬운 것이 아닙니다.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누구라도 배신할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보기만 봐도 치가 떨리는 많은 고문을 당하며 시퍼런 칼날에 목이 잘려나가는 것을 보고도 순교한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 고귀한 순교의 피가 이 땅에 떨어져, 무수한 성도들과 목회자들이 생겨났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세상에 무수한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났듯이, 우리 순교자들의 피로 인해 수많은 성도들과 목회자들과 교회들이 생겨났던 것임을 깊이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시대는 열심히 복음을 증거하며 사회에 많은 봉사로 헌신했던 분들이 차츰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믿음의 후배들이 본을 보며 이어가야 할 열정들은 점점 식어가고, 냉담해지는 성도들이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가는 시대를 어찌해야 좋을까요?
이제 어린이를 비롯하여 청소년, 청년들도 사라져 가고, 장년들마저 찾아보기 힘든 노년들의 교회로 변해 가는 모습은 실로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출산율이 낮고 고령화가 높아진 이유도 있지만, 우선 옛날의 열심을 다시 회복할 수만 있다면 신앙의 원상 회복은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 안에 목회자와 항존직들을 비롯해 전 성도들이 함께 교회 안에서 활기를 불어넣어야 합니다. 냉담하고 식어가는 신앙을 재점화하여, 뜨거운 기도와 뜨거운 찬양과 뜨거운 봉사로, 이웃을 향해 사랑이 충만한 시선으로 복음을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복음은 말로서만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모범된 사랑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 땅 많은 비신자들에게도 의로운 길을 안내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곧 가정과 사회에서 성숙한 연장자가 되고 젊은이들에게는 삶의 길잡이가 되어, 미래 세대에 대한 지혜의 창고 역할을 감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지금 신앙의 우선순위는 믿음을 재점화하여 다시 불타오르게 하는 것이 시급합니다. 더구나 지금의 교회 시스템으로는 오히려 살얼음판을 걷는 위기와 낭패의 길이 되고 말 것임을 명심 또 명심해야 합니다.
초대교회와 믿음의 선배들의 숭고한 순교정신을 계승하지 않고서, 기독교의 앞날은 그리 밝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먼저 목회자들과 장로, 그리고 항존직들의 시선과 사고방식이 바뀌어야 합니다. 자신을 철저히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며, 오롯이 주님을 향한 푯대로 삶의 무게를 채워가는 것만이 이 시대에 부흥의 불길을 재점화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효준 장로. |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