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효 목사
장재효 목사(서울 성은교회)

(본문)23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좇았더니 24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니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25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26예수게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27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

이적은 한자로 異(다를 이), 跡(흔적 적)입니다. 보통 인간의 지각, 이성적 분별력으로 이해가 잘 안되는 일이 생겨났을 때 그것을 이적이라 합니다. 기사는 奇(신기할 기), 事(일 사)입니다. 이것도 인간의 의식수준으로는 형이하학이나 형이상학적으로 전혀 이해 할 수 없는 신기한 일의 흔적이 나타난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있는 표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아보게 하기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내신 흔적을 말합니다.

1. 문둥병자의 사건을 통한 메시야적 증거(證據)

마태복음 8장은 1절부터 이적과 기적의 연속으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육신은 인간 영은 하나님이라는 신인양성(神人兩性)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모든 사람들로 알아보고 믿어지게 하시기 위하여 여러 가지 이적과 기적들을 나타내셨습니다. 그 모든 이적, 기적의 목적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 우리의 구주로 믿어지게 하시기 위한 표적을 위한 목적이 있었다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8장 1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이 산으로 기도하러 올라가셨고 밤새도록 하나님 아버지와 기도로 대화하시고 교통하시면서 그리스도로서의 소임을 성공적으로 감당하기위한 준비를 단단히 하시는데, 문둥병자 하나가 그 전날 계속 예수님 가까이서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통하여 마음에 깨달음과 감동이 와서 예수님을 통하여 믿음으로 자기병 고침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예수님을 놓칠세라 저녁에 예수님이 산으로 올라가실 때 그 뒤를 멀찍이 따라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어느 지점에 자리를 잡고 기도를 시작 하셨을 때 그 문둥병자도 거기서 얼마나 떨어졌는지는 모르지만 내려오실 길목을 지키고 앉아서 기도하며 예수님이 내려오실 때를 기다렸습니다. 날이 밝아올 때 예수님이 기도를 다하시고 내려오시다가 길목을 지키고 있던 문둥병자를 제일 먼저 만났습니다. 그 문둥병자는 나아와 절하고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합니다. 이 함축된 표현의 간절함 속에는 자기는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문둥이인 자신을 위해서 오신 분으로 알아보고 믿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의 존재와 사명을 알았습니다. 그리스도로서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고 자기 백성의 죄를 대속하며 구원해 주실 예수님의 사명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능력이면 내 문둥병은 문제없이 고쳐 주실 수 있다는 것도 알고 믿어지지만 내가 문둥병 고침 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예수님의 마음에 달려있음도 알았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서의 절대주권을 100% 인정해 드린것입니다.

이 문둥병자의 말에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하십니다. 그리고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졌습니다. 이 기적도 예수님을 그 문둥병자가 알아보았고 믿어진 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오신 분이었다는 사실이 100%입증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세를 만난 우리로 하여금 성경에 불신앙으로 망했다는 기록으로 경계의 교훈을 삼게 하시고 또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고 믿어지게 됨으로 기적의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적적인 구원을 얻었다 하는 내용들은 우리로 하여금 그들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바르게 알아보고 믿어지는 믿음을 통하여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인 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문제를 이적 혹은 기적으로 구원 얻는 체험을 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믿을만한 증거의 재료거리로 제시되어 기록된 것이 성경이란 것입니다.

2. 백부장의 사건을 통한 메시야적 증거(證據)

문둥병자 일이 있고 난후 예수님이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때 가버나움의 백부장의 하인이 중풍병으로 몹시 고통하며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백부장은 예수님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마8:6)하니 예수님이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하십니다. 그러나, 그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마8:8)합니다.

이 백부장은 로마군대의 파견 대장이고 그 사람 밑에는 100명의 부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유대인이 아니고 로마 군대 장교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자신과 같은 사람이 있는 부대 안에 오시는 것을 감당 할 길이 없다고 하면서 아주 겸손히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알고 있고 자기는 죄인 중에 죄인으로 처신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이 얼마나 갸륵하고 겸손하고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그리고 그는 예수님이 계신 그곳에서 말씀만 하셔도 자신의 하인이 나을 줄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자리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마8:10下)하시고 그 자리에서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대로 될찌어다."하시니 그 즉시 하인의 병이 나았습니다.

이런 이적기사, 이것도 예수님이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표적의 하나였습니다.

그 백부장은 자기 하인의 중풍으로 인한 아픔을 자기 아픔으로 받아들이는 신앙 인격을 가졌으며, 유대인을 위하여 구제도 하고 회당도 지어 줄 수 있었다는 것은 그 사람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잘 아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비록 이방인인 로마군대의 장교였지만 그도 하나님의 택하신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성령으로 그에게 예수님을 알아보고 믿어지게 해 주셨기 때문에 신앙인격 수양이 예수님께 점수를 딸 수밖에 없도록 겸손하고 진실했으며 섬김이 지극했습니다.

3. 베드로의 장모를 고친 사건을 통한 메시야적 증거(證據)

예수님의 제자들 중 베드로와 안드레, 또 야고보와 요한, 빌립, 바돌로메는 베드로가 사는 벳세다라는 동네에 살았습니다. 그 동네를 예수님이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을 데리고 부지런히 찾아 가신 것입니다.

베드로를 예수님이 제자로 데리고 다니시기 때문에 베드로 집에는 부인하고 아이들만 사는데 생활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너희 집에 생활비 좀 보내라고 돈 한 푼 주신일도 없고, 가장인 베드로는 예수님 계속 따라다니며 제자 노릇하느라고 집안일을 돌볼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아내가 할 수없이 친정어머님을 오시라고 해서 그 가정에 봉사하시다가 열병에 걸렸습니다. 동네 소문이 나기를 베드로가 예수님 따라 다니느라고 가정을 버렸기 때문에 그 장모님을 모셔다가 자녀들을 돌보게 하고 가사를 도와달라고 하고 베드로의 아내가 부둣가에 가서 노동해서 품 팔아서 먹고 살게 되었다고 수군거립니다. 그런데 그 베드로 장모가 열병으로 죽어가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아시고 12제자를 데리고 베드로 집에 가셨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장모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마8:15)했습니다. 언제 이 사람이 앓던 사람인가 할 정도로 깨끗이 나아서 열이 싹 내리고 멀쩡하게 일어나서 물통 들고 우물에 가서 물 길러가니 다른 사람들이 놀라며 어찌된 일이냐고 묻습니다.

베드로의 장모는 이 일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표적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 되어졌고 날이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왔으며 예수님이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쳐주셨습니다(마8:16).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함을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마8:17,사53:4). 그래서 베드로의 장모를 고친 이적기사의 표적이 베드로가 살던 동네를 복음화 시킬 수 있게 되어졌다는 사실입니다.

4. 예수님의 말씀을 통한 메시야적 증거(證據)

예수님의 이적기사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며 구약시대부터 보내주신다고 예언하신 분이 바로 이 예수님이라고 믿어지니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모여들며 옹위합니다. 그때에 예수님이 무리가 자기를 둘러쌈을 보시고 저 북쪽 가버나움으로 건너가기를 제자들에게 지시 하십니다. 그때에 어떤 서기관 하나가 예수님 앞에 와서 큰절을 하고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했습니다.

서기관이란 바리새파에 속한 사람으로 구약성경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며 백성들을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구약성경에 아주 통달한 연구자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교법사로, 혹은 율법사로 호칭하기도 했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을 알아보는 것 같은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하셨습니다.

이것은 거절의 말씀입니다. 물질기대심리와 허황된 생각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것은 필요치 않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제자였던 사람 중에 하나가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가서 장례 치르고 예수님을 계속 따르겠으니 장사할 수 있는 말미를 달라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의 대답은 참으로 냉담했습니다.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하십니다(마8:22)

"너는 내 제자이고 영생의 생명을 얻어 산자가 되었는데 산자가 왜 죽은 자의 일에 매여서 산자가 해야 할 살리는 일을 지체하고 시간을 엉뚱한 곳에 허비하려고 하느냐, 너는 나를 따르면서 계속 살리는 일에 참여하고 힘써야 하니까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 들을 장례 치르도록 내버려둬라"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죽은 자는 영적으로 죽어있는 사람들이고 , 또 저희 죽은 자라는 것은 육신이 죽은 빌립의 아버지를 말하는 겁니다. 아버지 초상 치르는 여유도 예수님이 주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날이 얼마 안 남았기에 제자들을 계속 훈련시켜야 하고 하늘소망의 진리를 깨우쳐야 하는 입장이 너무 빡빡하기에 아버지의 장례치르는 것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이 하게하고 너는 생명을 얻어 살았으니 나하고 같이 살리는 일에 힘써야 한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9:57이하에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있는데 거기는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합니다. 자기가 가정을 떠나 예수님을 따라 다니다 보면 가족들이 먹고 살아야 하는데 그 대책을 세워 주고 떠날 수 있게 될 때까지 자기에게 시간을 달라는 말입니다. 가족생계대책만 세워지면 나는 즉시 예수님을 따라 가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때에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잘 분석해보면, 그 사람도 구원을 얻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손에 쟁기를 잡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맡았는데 그 일이 영혼을 밭갈이해서 생명의 씨앗을 심는 일입니다. 즉, 복음 전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복음 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세상 일로 뒤돌아보게 되면 그 인생은 하늘나라에 못 들어간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습니다. 참 묘한 말씀입니다.

하늘나라의 생명을 얻었고 하늘나라가기를 목적하는 신앙인이라면 천국을 바라보고 말씀에 이끌리고 성령께 쓰임 받으며 하늘나라 가는 목적으로만 살아야지 육신이 세상일에 얽매이고 빠져든다면 천국에 못 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직접 말씀하시기를 "세례요한의 때로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노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2)하셨습니다. 천국을 쳐들어가서 차지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곳에 집중하고 열중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5. 풍랑을 잠잠케 하심을 통한 메시야의 증거(證據)

본문 23절부터 보면 제자들에게 가버나움에 갈 채비를 하라 하시고 예수님도 배에 오르셨습니다. 얼마쯤 갈릴리 호수를 건너는데 갑자기 바다에 큰 태풍이 불어 닥치니 파도가 산더미처럼 일어납니다. 그런데 배가 올라갔다 내려갔다가, 파도가 얼마나 세게 부딪혔는지 배안에 물이 쏟아져 들어옵니다. 배에 탄 제자들은 거의 다 갈릴리 출신이고 뱃사람, 어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바다를 건너는 배라면 전문가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자기네들의 기술과 경험과 노력을 다해서 억센 풍랑을 헤쳐 나가 보려고 발버둥을 쳤는데 파도는 점점 더 높고 억세게 배에 부딪혀 곧 뒤집힐 것 같습니다. 자기네들의 기술도 경험도 능력도 한계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도 이배에 타셨다는 생각을 하고 예수님을 찾다보니 배 밑에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배 위에 사공이었던 제자들과 배 밑에 칸에서 깊이 잠들어 주무시고계신 예수님의 모습은 정반대입니다. 제자들은 살겠다고 몸부림을 치는데 예수님은 편히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이 타신 배에 함께 탔다고 하면 어떤 천재지변도 예수님이 타신 배를 뒤집을 수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천지와 우주와 그 가운데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의 근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편안히 주무시고 계셨고 제자들만 안달이 나서 죽겠다고 호들갑떨고 소란스럽고 야단법석이었습니다. 그런데 편안히 주무시는 예수님을 보고 제자들은 흔들고 깨우면서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합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될 것인가는 관심도 없이 자기들의 어려움만을 호소하는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셔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고 그 즉시 바람과 바다는 아주 잔잔해 졌습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는 이 한마디 속에는 내가 이 배 안에 있는데 이 배가 무슨 일이 생길 것이라고 왜 공연한 걱정을 하느냐 이것입니다.

나라고 하는 그릇 속에 예수님을 모셨으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온전히 믿고 맡겨야합니다. 그분이 나를 자기백성 삼으시고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밀접해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에게 쓰실 계획을 알게 해주시는 것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있어서 나를 쓰실 계획이 남아있다는 겁니다. 주님과 동행하면 길이 평탄해질 것이며 일들이 형통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