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사스 샬롯에 위치한 언약교회(Covenant Church) 설립자이자 복음주의자인 마이크 하예스(Mike Hayes) 목사는 최근 크리스천포스트(CP)에 '일부 개신교인들이 백신을 거부하는 이유 3가지'라는 제목의 칼럼을 게재했다. 다음은 그 주요 내용.
두려움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다뤄야 할 문제다. 난 의학을 믿지 않는 가정에서 자랐다. 부분적으로는 성경의 가르침을 잘못 적용한 믿음 때문이다. 우리 부모님은 치유를 위해 오직 기도하며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고 믿었던 오순절 교회에서 구원을 얻었다. 교인들에게 의사와의 만남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들은 신실한 기독교인들이었지만, 잘못 인도함을 받았다.
오늘날 난 기도할 때 치유해 주심을 믿으며, 또 하나님께서 의사들의 진료와 처방약을 통해 치유를 주신다고 믿는다. 좋은 의사들은 항상 목숨을 걸고 병마와 싸운다. 그들은 히포크라테스 선서처럼 항상 사람들을 돕기 위해 나섰고, 해를 끼치지 않으려 했다.
대로 어떤 방법으로도 치유가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신명기 29장 29절 "감추인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에 나타난 진리가 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을 때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계획을 갖고 계신다. 그렇기 때문에 난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믿음의 동의어는 신뢰다. 믿음이 더 어렵다. 말하기는 쉽지만 두려움에 대한 공격은 믿음으로 싸워야 한다.
오늘 난 일부 기독교인들이 가진, 백신을 거부하는 3가지 이유를 보고자 한다.
첫째, 과잉 애국심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문화를 정의하는 일부는 투박한 개인주의다. 그들은 "우리는 자유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 정부는 내게 백신을 맞으라고 지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와 관련, 일각에서는 선호하는 정치 후보에 따라 백신에 반대하기도 한다. 사실 이는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대항해 생명을 구하기 위한 싸움이고, 정쟁의 불씨가 아니다.
둘째, 두려움이다. 때로 사람들이 백신을 원치 않는 이유는 바늘로 투여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를 두려워한다. 다른 이들은 그들이 온라인에서 코로나19 백신을 맞으면 불구가 될 수 있다거나 그와 비슷한 주장을 들었기 때문이다. 인터넷은 모든 이들이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장이 되었지만, 대부분은 사실이 아니다. 최근 한 친구는 "시각장애인의 시력 회복에 대해선 잘 모르겠지만, 인터넷은 확실히 언어장애자들이 말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잘못된 정보의 확산은 심각한 제자 훈련의 부족을 나타낸다.
셋째, 어떤 믿음의 이유 때문이다. 사람들은 "난 하나님을 믿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진실처럼 들릴 수 있는 만큼, 두려움의 장막도 될 수 있다. 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페니실린, 암 치료제, 그리고 심지어 코로나19 백신에 이르기까지, 생명을 구하기 위한 의학적 발전을 주셨다고 믿고 감사드린다.
백신에 대한 이 같은 저항의 이유들은 새롭지 않다. 내가 어릴 때는 어떤 백신도 맞지 못했다. 14살 때 우리 가족은 휴스턴으로 이사했는데, 학교에서는 나와 형제들의 등교를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보건상의 이유로 필요한 백신들을 맞게 됐다. 어떤 맥락에서 당시 백신은 지금과 같이 의무화됐다.
개인적으로 난 부분적으로 유익이 위험보다 더 크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코로나19 백신을 맞기로 결정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는 위험과 유익의 비율이 있다. 여러분은 교통사고로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가게에서 음식을 사먹지 않겠다고 결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음식을 사지 않으면 굶게 될 것이다. 음식점에 갔을 때의 얻을 수 있는 유익이 위험보다 훨씬 크다. 당신이 인생에서 하는 모든 일에서 이러한 요소들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복음의 사역자로서 더 큰 이유가 있다. 종종 다른 주나 다른 나라에서 설교할 경우가 있는데, 백신 접종을 하지 않는다면 여행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백신 접종이 정부의 의무사항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많은 교회는 물론, 아이들을 돌보는 이들 뿐 아니라 초청 연사들에게도 이를 요구할 것이다. 이는 양떼를 돌보는 일에 관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볼 때, 코로나19 백신과 싸울 가치가 없다. 내게 있어 목숨을 바쳐 저항해야할 만한 산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