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만 하면 부끄러운 시간이 있다. 부끄럽고 미안한 것이 이것뿐은 아니다. 이를 테면 이것은 공개 가능한 부끄러운 사건이다. 때는 88년 신분은 군종목사 후보생, 장소는 후보생 훈련소인 육군 제 3사관학교였다. 훈련 중에 의사표현을 강하게 하다가 세분의 동기 목사님이 구속을 당했다.
우리들이 속한 훈육대 분위기는 싸늘했다! 누가 다음 희생양이 될지도 모르는 살얼음판이었다. 실제로 몇 사람이 헌병대에 불려 가서 조사를 받고 왔었다. 그런데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서 훈련이 종료되고 곧 임관을 하게 되었다. 우리에게 남은 카드는 꼭 한 장! 집단적 임관 거부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군대에서 가장 큰 죄로 다루는 집단 항명이었다.
당시 우리는 네 사람의 대표들이 전체를 이끌었다. 한 사람이 구속되고 셋이 남았다. 우리 셋은 방법을 찾으려고 골몰했으나 답이 없었다. 뜻이 있고 기개가 있는 동기들과 의논도 했다. 모두 진지하게 아픔을 공유했었다. 우리들이 하나가 되어 임관을 거부하면 국면 전환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동기들에게도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주동자나 동참자들이 혹독한 고초를 당할 것은 너무나 뻔했다.
고민이 많았다. 수일간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임관 거부를 하다가 영창에 가는 꿈도 꾸었다. 부끄럽게도 아무 짓도 못했다. 날짜에 밀려서 임관했다. 너무 힘들었다. 생각하면 아직도 맘이 찢어진다. 임관 후 그 동기들을 만났다. 너무 부끄럽고 미안했다. 미안했던 마음이 아직도 생생하다.
함께 임관하지 못했던 동기 목사님들도 각자 잘 살아왔다. 그중에 한 사람은 미국에 있다. 목회도 잘했고 아들들도 잘 키웠다. 허물없이 만난다. 좋은 친구다. 그러나 여전히 미안하고 부끄럽다. 그 날들이 많이 아쉽다. 용기도, 야성도 부족했다. 잊을 수 없는 30 수년 전 아픔이다.
금번 1월 18일은 마르틴 루터 킹 목사님의 기념일이다. 미국 인권운동의 대부인 그는 목사님의 아들이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회자가 되는 것이 사명이라 여겼던 마틴 루터는 침례교 목사가 되어 1954년부터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 한 침례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평범한 목회자의 길을 걷던 마르틴 루터 킹 목사는 흑인 차별 사건을 목도하며 인권운동을 시작했다.
그의 길은 고달팠다. 온갖 비난을 감수해야 했고, 살해의 위협도 있었고, 실제로 그는 젊은 39살의 나이에 백인 우월주의자 쏜 총을 맞아 숨을 거두었다. 멤피스에 그가 서서 마지막 연설을 하다 총을 맞았던 호텔을 둘러본 적이 있었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의 용기와 기백이 부러웠다.
시시때때로 불의를 목격한다. 그냥 지나치는 것이 편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것만큼 무책임한 말은 없다. 좋은 게 좋다고 생각했다면 노예 해방도, 인권 평등도 없었다. 지금 같은 민주주의도 없다. 그렇게 악과 맞섰던 피와 눈물이 오늘 우리 삶의 토대가 되었다.
고독한 내부 고발의 용기와 정의감이 부러워한 적이 있다. 천성적으로 찌질하고 소심하고 이기적이지만 훗날 부끄럽지 않도록 정의의 편에 서는 길을 택하려 한다. 잠시 혼란과 고통을 당해도 부끄러운 후회를 또 하나 더 만들지는 않으리라 다짐한다. 시편 기자는 "정의를 지키는 자들과 항상 공의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06:3)"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