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간에 예지하고 오랜만에 점심식사를 같이 했는데 식사를 하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예지가 새 학기에 학교에서 맡은 반 아이들이 어떤지를 물었습니다. 사실 그렇게 물은 것은 예지네 반 아이들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그 아이들을 가르치는 딸아이에 대한 아빠로서의 관심 때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얼마 전 예지가 이번 학기에 자기가 맡는 반 학생 중에는 5명이 소위 학습이나 언어 능력이 부족해서 특별한 배려가 필요한 아이들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힘들지는 않는지 내심 딸이 걱정되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예지가 가르치는 아이들이 2학년인데 그 학교 2학년 학생중 그렇게 특수 교육이 필요한 아이들이 모두 7명인데 그중에서 5명을 예지가 맡았다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지가 교장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이유는 두 가지라고 하더랍니다. 첫째는 다른 선생에 비해 예지가 아이들을 잘 돌보며 잘 가르치기 때문이고, 또 다른 이유는 그런 아이들은 서로 다른 반에 분리시켜서 가르치는 것보다 가능하면 같은 반에서 가르치는 것이 더 나은 학습 효과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더랍니다. 딸이 아이들을 잘 돌보고 잘 가르친다는 말이 싫지는 않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다른 선생들보다 더 무거운 책임을 지는 딸이 안쓰러웠습니다.

예지가 맡은 아이들 중에는 학년은 2학년인데 언어능력은 2살밖에 되지 않는 아이도 있고, 같은 연령대의 다른 아이들에 비해 평균 학습 능력이 많이 부족한 아이도 있고, 집중력이 없이 산만한 아이, 그런가 하면 신체적 질환 때문에 특별한 배려가 필요한 아이도 있답니다. 다섯 아이가 모두 다 특별한 배려가 필요한 아이들인데 그날은 그 아이들 중에서도 한 여자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 아이는 소아당뇨병을 앓고 있는데 매 3분마다 자동으로 모니터가 혈당을 체크해서 혈당이 모자라면 인슐린을 투여해 주는 시스템이 들어있는 주머니를 등에다 부치고 다닌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학교에 있는 시간에도 매일 하루 3번씩을 양호실에 가서 체크를 받아야 하고 밤에 잘 때에도 매일 밤 2번씩 일어나서 체크해야 하고, 그리고 등에 부치고 다니는 주머니속의 튜브는 매 3일마다 갈아줘야만 한답니다. 그러니 그 아이가 얼마나 힘들지 짐작이 가는데 더 기가 막힌 것은 그 아이보다 2살이 많은 언니가 있는데 그 언니도 이 아이와 똑 같은 소아당뇨병을 앓는다는 것입니다. 한집에 두 딸 아이가 같은 질환을 앓는다는 것, 그것도 완치될 가능성은 없고 평생을 그렇게 투병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그 가정에 버거운 짐일지는 생각만 해도 마음이 저려왔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소아당뇨병만 앓는 것이 아니라 디스렉시아(dyslexia)라는 증세도 앓고 있답니다. 이게 무슨 증세인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해서 그게 무슨 증세인지 물어봤더니 그 병은 듣고 말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지만 글자를 읽고 이해하는데 문제가 있는 증세랍니다. 사전에서 찾아봤더니 우리말로는 난독증(難讀症)이라고 하는데, 지능은 정상이지만 글자를 읽거나 쓰는데 어려움이 있는 증세로서, 이 증세를 가진 대다수 환자들은 글자에서 말의 최소 단위인 음소(音素, phoneme)를 구분하지 못하는데 특별한 치료 방법이 아직은 없는 증세라고 합니다. 이 증세를 앓고 있는 예지네 반 아이도 두뇌는 정상이지만 숫자를 익히거나 단어를 맞추는 것을 잘못하고, 글자도 어떤 알파벳은 거꾸로 적고, 때론 색깔과 형태를 혼동하기도 한답니다. 그러니 자연히 다른 아이들에 비해 말을 더디게 배우고 발음하는데도 문제가 있어서 학습 능력이 많이 부족한 아이랍니다.

초등학교 2학년이면 마냥 천진스럽게 자라야 할 아이가 원인도 모르게 걸린 만성 질환과 치료 방법도 없는 증세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이야기를 듣는데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다 들은 후 예지에게 “그 아이는 학교에서 공부하는거나 살아가는게 참 힘들겠다. 더구나 자매가 같이 그러니 얼마나 힘들겠니?”하고 말했는데 사실 그렇게 말한 것은 그런 질환과 증세를 가지고 살아가는 아이에 대한 연민도 있었지만 그런 아이를 매일 같이 교실에서 대하면서 가르쳐야 하는 예지가 얼마나 고생할까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지는 아주 뜻밖의 대답을 제게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아냐, 아빠, 걔는 아주 행복해해. 걔는 자기 언니가 자기와 똑 같은 병이 있어서 너무 다행이라고 좋아해. 그래서 나도 별로 힘들지 않아” 그렇게 말하는 예지의 표정이 밝은 것을 보니 자기가 힘들까봐 걱정하는 아빠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그 아이는 행복해 한다는 뜻으로 하는 말인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지의 말을 들으면서 새 학기를 맞이하면서 자녀들의 공부 때문에 걱정하는 부모님들에게 드릴 말 한마디가 생각이 났습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