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3:1~9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갈라디아서 3장 4절의 말씀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진리를 분명히 가르치는 서신입니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의 사상적 배경이 된 귀한 서신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래 갈라디아교회를 세울 때에 이 진리를 가르쳤고, 그들도 그대로 믿었고, 그 믿음 때문에 많은 핍박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후 얼마 후에 한 유대인 일파가 가만히 그들에게 들어와서 선전하기를, 믿음만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고 할례와 모세의 모든 율법과 제도까지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처음 믿는 그들은 그 선전대로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소식을 듣고 바울은 이 갈라디아 서신을 썼습니다.
3장 1절 이하를 제가 다시 읽을 때에 들어보세요.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그리고 3장 4절에는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으로 시작하였다가 할례와 율법으로 돌아가면 과거에 받은 많은 괴로움이 헛된 데로 돌아간다고 경고하였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고난을 헛되이 받지 말라'는 이 말씀을 중심해서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옛날부터 생로병사, 인생의 사고(四苦)란 말이 있습니다. 나는 것이 괴로우며, 늙는 것이 괴로우며, 병드는 것이 괴로우며, 죽는 것이 괴로움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인간은 누구나 고난을 당합니다. 우리 믿는 이들도 역시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현세에서는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면 고난에도 목적이 있고, 그 가운데도 은혜와 축복이 있는 것이 또한 사실입니다.
쇠가 풀무에 들어가지 않고는 강철이 될 수 없습니다. 금덩어리도 불에 들어가지 않고는 정금이 되지 못합니다. 아무리 큰 조개, 대합이라도 그 속에 깔깔한 모래가 들어가지 않으면 진주를 만들지 못합니다. 거센 물결이 있기에 숙련된 수부(水夫)로 연단이 됩니다. 곡식이 잘 익어 곳간에 들어갈 수 있는 알곡이 되는 데는 햇빛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비와 바람도 있어야 하고, 때로는 찬 서리도 맞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 가장 귀한 고귀한 인격, 성품, 능히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심령으로 성장하는 데에는 때로는 고난도 필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한 시인은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시편 119편 71절에 증언하였습니다. 욥의 고난이 없이 인내의 욥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전에 삼손은 블레셋에 내려가다가 사자를 만났습니다. 그 사자와 싸워 이겨 죽이고 지나갔는데, 돌아오다 보니 그 사자의 시체 속에 벌들이 꿀을 만들어 시장한 삼손이 그 꿀을 먹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인생행로에서 고난을 만나는 것은 반가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고난을 바로 당하면 그 속에 단 꿀이 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도 인간은 인내, 겸손, 사랑, 동정심, 지혜, 용기, 능력 등등의 모든 덕이 구비된 고귀한 심령으로 성장합니다.
어떤 사람이 아프리카를 여행하던 중, 길가에서 보니 한 아름다운 범나비가 고치 속에서 나오는데 아직 줄이 그 고치에서 채 떨어지지를 않아 펄럭거리며 매우 고난당하는 것을 보고, 그 나비를 돕기 위하여 칼로 거기에 붙은 줄을 베어주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 나비가 자유로워지기는 했는데 이상한 것은 조금 있다가 그 아름다운 빛깔이 다 변해서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인간도 고난 가운데서 그 영혼의 모든 아름다운 빛깔이 나타납니다.
고난 가운데는 물론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데, 그 가운데서 누구나 흔히 당하는 고난 몇 가지를 구체적으로 생각하여 보고자 합니다.
먼저, 인간은 누구나 때로는 병상에 눕게 됩니다.
'병은 눈썹에서 떨어진다.'는 속담과 같이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언제 중병에 걸릴는지 모릅니다. 특히 서울과 같은 데에는 병원마다 환자로 가득하고 또 우리 교우 중에도 병환으로 고생하는 이들이 많이 계십니다. 질병은 우리에게 큰 고통을 줍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의 경험으로 보면 이 병환 가운데에도 또한 은혜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성 프란시스 같은 이도 본래는 부잣집 아들로 세상의 열락을 사랑하였으나 중병을 앓으면서 그 삶이 온전히 변하여 우리가 아는 성자로 역사에 나타나게 된 것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일입니다. 파스칼 같은 과학자도 중상을 입고 오래 치료하는 중에 깊은 신앙의 사람으로 변해서 그 유명한 <파스칼의 명상록>을 또한 쓰게 된 것입니다. 밀턴은 소경이 되어 이 바깥 세상을 아주 보지 못하게 된 후에 그 신령한 눈이 밝아져 하늘의 낙원을 보고 유명한 <실낙원>이란 책을 저술한 이야기를 우리가 잘 압니다.
유명한 음악가 베토벤은 아주 귀머거리가 되어서 소리란 도무지 들을 수 없게 된 후에 오히려 영원한 하늘의 음악을 듣고 더 훌륭한 명곡을 남긴 것도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 육신을 괴롭히던 가시로 말미암아 더 큰 은혜를 받고 "나는 약할 때에 강하니라"고 외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병석에 눕게 될 때에 자연히 조용한 시간을 가지게 됩니다. 과거를 반성하게 됩니다. 인생의 허망함을 실감하게 됩니다. 겸손하게 됩니다. 마음이 부드러워집니다. 장래를 예측할 수 없게 될 때에 인생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삶이 무엇인가? 죽음은 무엇인가? 또 자리에 반듯이 눕게 되니 자연히 위를 바라보게 됩니다. 영원을 사모하게 됩니다.
여러분! 병상에서 구원을 받은 심령이 많습니다. 이미 믿던 이들이 병상에 눕게 될 때에 더욱 새로운 은혜를 받습니다. 세상을 덜 사랑하게 됩니다. 심령이 더 깨끗하여집니다. 병상을 통하여 새로운 은혜를 받고 교회와 사회에 크게 봉사하는 이들도 너무나 많습니다. 여러분, 병상에도 축복이 있습니다. 질병의 괴로움을 헛되이 받지 말아야 합니다.
또, 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으로서 때로는 눈물을 흘려 보지 않은 이는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왜? 이 세상은 눈물의 세상입니다. 사람은 세상에 올 때에 울면서 오고, 세상을 떠날 때에 눈물 가운데 갑니다. 이 세상은 한번 왔다 가는 세상입니다. 노인도 가고, 청년도 가고, 때로는 어린이도 갑니다. 의학이 아무리 발달된다고 하여도 역시 인간은 한 번은 가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의 말씀대로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그대로입니다. 때로는 갑자기 갑니다. 사실 우리는 언제 우리 자신에게 또는 우리 가정에 이 눈물의 사자가 찾아올지 알 수 없습니다. 슬픔은 우리 모든 인간의 공통된 경험입니다.
여러분! 이 눈물의 사자도 축복의 선물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잊지 아니하여야 합니다. 오직 캄캄한 밤에만 멀리 있는 하늘의 별들을 볼 수 있습니다. 눈물의 렌즈를 통하여 영원한 세계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절망이 영원한 소망의 시작이 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영생의 주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눈물의 사다리를 통하여 우리는 영원한 세계로 들어갑니다.
뿐만 아닙니다. 눈물의 사자를 통하여 인간의 마음은 더욱 부드러워지고 사랑과 동정심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가장 고귀한 심령으로 성장합니다. 어떤 이는 자기의 귀한 딸을 잃고 불우한 많은 젊은 딸들을 불쌍히 여겨 윤락여성을 위한 큰 사업을 펼친 이도 있고, 어떤 이는 귀한 아들을 잃은 큰 슬픔 가운데서 부모 없는 많은 고아들을 동정하여 고아 사업을 크게 펼친 이도 있다고 합니다. 우리 교우 중 어떤 분들은 노부모님을 이북에 두고 그 슬픔 가운데서 매년 자기 부모님 생일 때마다 우리 경로원 노인들을 대접한다고 합디다.
미국 흑인 노예 해방에 큰 역할을 한 유명한 <엉클 톰스 캐빈>(Uncle Tom''s Cabin) '톰 아저씨의 오막살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을 쓴 스토우 부인은 귀한 아들을 일찍 잃고, 그 큰 슬픔 가운데서 당시 흑노 매매 제도에 의하여 아들과 생이별하는 흑인 어머니를 동정하여 그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위대한 작품의 배후에는 큰 슬픔이 있었습니다. 슬픔은 때로는 이렇게 위대한 창조적 활동으로 승화됩니다. 여러분, 슬픔을 헛되이 당하지 마십시다.
또, 요사이 신문을 보노라면 어떤 회사가 부도를 냈다는 말이 종종 있습니다. 사업하다가 실패하는 이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사업의 실패야말로 당사자에게 큰 고통을 안겨줍니다. 사업에만 실패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학생 가운데는 예비고사에 실패하는 이도 있고, 또 입학시험에 실패하는 이도 있습니다.
또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직에 실패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어떤 이는 결혼에 실패를 하고, 또 어떤 이는 연애에 실패를 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실패가 많은 세상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실패의 고난도 헛되이 받아서는 아니됩니다. 옛날부터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란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실패 가운데 성공의 요소가 있으니 그것을 찾아내라는 말입니다. 실패 속에서 정직하게 나 자신을 반성해야 합니다. 고칠 것은 고쳐야 합니다. 쓴 실패의 경험 속에서 새로운 지혜를 찾아내야 합니다. 낙심하지 아니해야 합니다.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정직하게 실패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재기의 기회를 주십니다. '젊어서 고생은 금 주고도 못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 번 실수는 병가(兵家)의 상사(常事)'라는 말도 있습니다. 실패의 죽은 사자 속에서도 꿀을 찾아내야 합니다. 실패의 고난도 헛되이 받지 마십시다.
이 진리는 개인뿐 아니고 민족과 국가의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6.25로 말미암아 우리 민족이 얼마나 큰 고난을 받았습니까?
우리는 이 고난도 헛되이 받아서는 아니됩니다. 우리는 이 큰 고난을 통하여 교훈을 받아서 우리 민족이 좀더 슬기 있고, 좀더 깨끗하고, 좀더 용기 있고, 좀더 단결할 줄 아는 국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공산당에게 속지 아니해야 합니다. '유비무환', '자주국방'을 튼튼히 해야 합니다. 모든 고난을 극복하여 경제와 문화의 계속적인 발전을 이루어야 합니다. 인권 중에서 가장 귀한 것은 생존권입니다.
안보제일주의로 나가야 합니다. 월남 피난민들의 참혹한 정황을 매일 신문에서 우리가 읽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6.25와 또 지금도 계속되는 38선의 고통을 헛되이 받아서는 아니됩니다. 이 고난을 통하여 우리 민족이 중흥하고 정신적으로, 문화적으로, 또한 물질적으로 비약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평화통일도 이루어집니다. 이 운동에 우리 크리스천들이 선두에 서야 될 것입니다.
고난을 헛되이 받지 아니하려면 우리 모두가 주께 돌아오고 주 안에 튼튼히 서야 합니다. 우리 민족이 새로운 민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새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만민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우리 민족이 받은 이 6.25와 38선의 큰 고난에는 이를 통하여 전 아시아를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큰 경륜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이들은 이 큰 고난 가운데서 먼저 은혜를 받아, 우선 우리 민족을 구원하고 전 아시아를 구원하는 데 총궐기하여야 하겠습니다.
한 가지 고난, 혹은 고통이 없는 이는 별로 없습니다. 그저 겉으로는 다 미소를 띠지만 어딘가 모르게 한 가지 고통은 거의 다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 안에서는 이 고통도 은혜가 됩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이 고난을 통하여 큰 축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아버지시여, 저희들은 허물과 죄가 많은 자식들이올시다. 그러나 십자가의 공로를 믿고 아버지 앞에 나아왔습니다. 이 시간 중심으로 회개하는 모든 자녀들의 회개와 죄를 사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해서 우리가 과거에는 어떠한 생활을 하였든지 앞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부끄러움이 없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