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흥행에 성공한 것은,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에도 불구하고, 그 영화가 작품으로서 갖고 있는 완성도가 높아서가 아니다. 영화를 보기 두 주 전쯤 프레디 머큐리(Freddie Mercury, 본명은 Farrokh Bulsara)의 일생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솔직히 영화보다 다큐멘터리가 더 좋았던 것 같다. 이 영화에 많은 관객이 몰린 이유는 사실 프레디 머큐리라는 인물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의 음악 때문이다. 그의 음악이 아니었다면 이 영화에 공감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대부분의 2030세대에게 '퀸'(Queen)은 이름조차 생소한 록밴드다. 그들에게 이 영화는 이젠 지나간 역사가 된 20세기 대중문화를 이해하는 좋은 역사책이다. 또한 2019년 초 대한민국에서의 삶에 점점 지쳐가는 5060에게 보헤미안 랩소디는 희미한 기억 속, 나름 낭만이 있었던 젊고 어렸던 그 시절, 1970년대로 되돌아가는 타임머신이기도 하다.
내가 '여왕'(Queen)을 처음 접한 것 중학생 때(1976년 경) 친구 집에 놀러갔을 때였다. 이태리에서 성악을 공부하고 지금은 프랑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 친구의 집은 광화문 옛 새문안교회 건물 바로 뒤에 있었다. 당시 그곳은 오래되어 쓰러져 가는 한옥들과 좁은 골목길이 엉켜 있는 전통 한옥마을이었다(그 동네를 재개발하지 않고 보존했더라면 지금 관광명소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이 항상 있다). '퀸'의 멤버들의 사진이 인쇄된 LP 앨범을 친구가 조심스럽게 꺼내 턴테이블위에 올리자 난생 처음 들어보는 사운드가 흘러나왔다. 내가 갖고 있던 음악의 경계선을 훌쩍 넘어가버린 노래였다. 처음부터 두 번 반복해서 들었던 기억이 난다. 우리 집에는 클래식 음악 음반밖에 없었던 터라 그 친구가 좀 부러웠다. 보헤미안 랩소디를 처음 들었을 때 영어 가사는 거의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래도 '마마∽'하는 부분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 때는 어렸던 터라 '보헤미안 랩소디'를 좋아하면서도 왜 좋아했는지를 잘 몰랐다. 이번에 영화를 보면서 그 이유를 분명히 알게 되었다. 퀸의 노래에는 '광기(狂氣)어린 천재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광기(狂氣)'는 무언가에 미쳐버리는 것이다. 머큐리는 미친 듯이 작곡하고, 미친 듯이 노래한다. 평소 성격이 지극히 내성적이라, 모르는 사람들과는 잘 어울리지 못하던 머큐리는 사실 조용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대중음악가로서 머큐리는 광적인 에너지를 쉴 새 없이 폭발적으로 뿜어낸다. 그래서 미친 듯이 열심히 자신의 일을 하는 그의 모습은 한 마디로 멋있다.
무엇이든 미친 듯이 한 가지에 집중해서 살아가는 인생은 멋있다. 사랑도 미친 듯이 해야 멋진 사랑이다. 남들이 보기에 약간 '맛이 간(?)' 것처럼 보이는 사랑이 진짜 사랑이다. 계산하고, 품평하고, 앞뒤를 따지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거래다(2030세대의 결혼 비율이 낮은 건 미친 사랑을 하는 법을 몰라서, 그리고 사랑을 거래로 배워서가 아닐까?). 일도 미친 듯이 하면 천직(天職)이 되지만, 하기 싫은 일을 돈 때문에 억지로 하면 그건 생계유지의 방편일 뿐이다. 기독교인은 주(主)의 일이 생계방편이 된 사람을 삯군이라고 부르며 경멸한다. 삯군과 진짜 일꾼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 일 자체가 좋아서 돈을 안줘도 하려고 하는 열정이다(예전에 미친 듯이 성경을 연구하던 시절을 떠올리면서 나도 요즘 삯군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살짝 든다). 머큐리의 인생은 비록 짧았지만 이런 열정이 있었다. 어느 누구인들 이런 삶을 살고 싶지 않겠는가?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우리를 향해 이런 질문을 한다. '당신은 얼마나 열정을 갖고 당신의 일을 하는가? 당신은 일터에서 삯군처럼 일하는가? 아니면 하는 일 자체를 즐기고 있는가?'
'광기(狂氣)어린 천재성'의 '천재성'은 그가 태어날 때 타고난 것이다. 물론 그것을 후천적으로 갈고 닦아야 빛이 나는 것이지만, 자기 안에 없는 것을 갈고 닦을 방법은 없다. 그의 목소리는 그가 타고 난 것이다. 머큐리가 자신이 쓴 가사를 스스로 읊어가면서 멜로디를 다는 모습을 보면 범부(凡夫)에게 없는 재능을 그가 갖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누구에게나 다 그런 천재적 재능이 그 사람 안에 담겨져 있다는 사실이다. 머큐리는 음악적 재능을 갖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아일랜드 격투기 선수 코너 맥그레거(Conor McGregor)가 갖고 있는 그런 근육과 그런 재능은 없다. 인간은 누구나 천부(天賦)의 재능을 갖고 있다. 기독교인은 그것을 하나님이 주신 영적인 은사(spiritual gift)라고 부른다. '내'가 그것을 스스로 발견하고 개발하여, 그 재능과 은사가 활짝 꽃이 피었을 때, 그리고 거기에 미친 듯이 그 재능을 발휘하는 열정이 더해졌을 때 '나의 존재의 의미'가 드러나게 된다. 그 재능을 스스로 발견하고 사용하지 않았다면 머큐리는 그냥 런던 히드로 공항의 수하물 직원으로 그의 인생을 마쳤을지도 모른다. 머큐리가 영화 속에서 한 말, "I am trying to become what I want to be"란 말이 바로 그런 뜻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또 다른 질문을 우리에게 한다. '당신은 하나님이 주신 당신의 재능을 얼마나 잘 사용하고 있는가? 당신은 당신의 영적 은사를 발견, 개발, 사용하여 평생 당신의 업(業)으로 선용(善用)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주신 재능과 은사를 단순한 취미활동이 아니라 자신의 직업과 연결해서 사용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일에 푹 빠져서 열정을 갖고 미친 듯이 일할 수 있다면, 어쩌면 그 사람을 성공한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매력적인 인생이 될 것이다. 게다가 돈은 결과적으로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교과서적인 완벽한 자아실현(自我實現)이다. 머큐리는 이 점에서는 성공했다. 머큐리가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그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답을 찾았다. '나는 퀸의 프레디 머큐리다.' 그는 성공한 대중 음악가이고 온 세상이 그가 누구인지를 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인간의 자아실현이 끝나는 것일까? 아니다. 인간의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인생에는 또 다른 질문이 있다. 더 중요한 자기 탐구의 과제가 남아 있다. 그 탐구는 사랑(love), 인간의 성애(sexuality), 결혼(marriage)에 관한 것이다. 학교 교과서가 자아실현에 관해 가르칠 때 이 점에 관해 많이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사실 인생에서 직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과 결혼이며,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서 사랑과 결혼이 50% 이상의 지분을 갖고 있음을 우린 잘 알고 있다.
영화 속에 머큐리가 미래의 연인인 메리 오스틴이 일하는 여성 옷가게에서 그녀와 만나는 장면이 있다. 머큐리가 여자 옷을 골라 입고, 여자 옷을 입은 머큐리가 별로 어색하게 보이지 않는 장면에서 우리는 두 남녀 사이에 앞으로 일어날 불길한 미래를 예상하게 된다. 머큐리는 오스틴을 사랑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청혼했다. 그가 오스틴을 위해 만든 불후의 명곡 'Love of My Life'의 가사와 멜로디는 그녀를 향한 그의 사랑이 가식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아름다운 증거다. 하지만 그들은 가정을 이루지 못했다. 머큐리가 자신이 양성애자(bisexual)라는 것을 그녀에게 고백했기 때문이다. 머큐리가 에이즈로 죽을 때까지 두 사람은 '소울 메이트'(soul mate)로 지냈다. 그는 1985년 어느 인터뷰에서, "나의 유일한 친구는 메리이며, 다른 누구도 원하지 않는다. 내게 그녀는 관습법상 아내고, (우리 관계는) 결혼생활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신뢰하고, 그걸로 충분하다"고 말하기조차 했다.
그의 공적인(public) 삶에서의 엄청난 성공에도 불구하고 한 명의 인간으로 그는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사랑, 인간의 성애(性愛), 결혼이라는 사적인(private) 삶에서 그는 'Who am I?'라는 질문의 정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애에 관한 한 그는 '혼동'(confusion)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다. 그에게는 일생에 여러 명의 여성과 남성 파트너들이 있었고, 그의 마지막 연인이었던, 짐 허튼은 정답이 아니라, 그를 거쳐 간 마지막 파트너였을 뿐이다.
인간의 성애(性愛)는 내가 누구와 우정(friendship)을 나눌지, 그리고 누구와 사랑(love)을 나눌지를 결정해준다. 남자와 여자 사이의 성적인 결합은 단순히 인간의 번식(procreation)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는 누구인가?'를 찾아가는 인생의 중요한 여정이다. 인간은 동물이 아니기 때문에 발정이 난 사람끼리 사랑을 나누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갖고 있는 사람과 선택적으로 그리고 배타적으로 사랑을 나누며, 성애(sexuality)는 그 사람과 내가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깊은, 친밀한 관계를 이루어가는 과정이다. 그 관계 속에서 인간은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를 발견한다. 성애에 기초한 이런 결혼 관계없이 인간은 내가 누구인지를 발견할 수 없다. 그런 사람은 영원히 채워질 수 없는 내적인 공허 속에서 불행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안타깝게도 머큐리는 그 길로 걸어갔다. 그래서 이 영화 우리를 향해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사랑, 성애, 결혼을 통한 관계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발견하고 그 관계 속에서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가?'
안타깝게도 오늘 날 우리 자녀들이 성적인 자기 정체성(sexual self-identity)을 찾아가는 여정에는 머큐리가 살던 시절보다 더 많은 혼란과 함정이 있다. 인간의 젠더(gender)를 자신이 타고 태어난 생물학적 성(sex)과 상관없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선택의 폭이 수 십 가지가 된다는 것을 공공연히 학교에서 가르치려고 한다. 게다가 그 젠더는 조변석개(朝變夕改)가 가능하다고 한다. 이건 우리 자녀가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찾아가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빠져나올 수 없는 미로(labyrinth)에 빠뜨리려고 하는 음모다. 젠더가 아침, 저녁으로 인간의 선택에 의해 계속 바뀐다면 과연 인간의 성애가 의미 있는 지속적 인간관계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을까? 프레디는 "Somebody to love"라는 노래에서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사랑할 사람을 나에게 찾아줄 사람 누구 있나요? Can anybody find me somebody to love?
오, 매일 아침 내가 일어날 때마다 나는 조금씩 죽어요. Ooh, each morning I get up I die a little
내 발을 딛고 서있는 것도 거의 힘들어요. Can barely stand on my feet
(너 자신을 봐) 거울 속의 나를 보고 울음을 터뜨려요 (Take a look at yourself) Take a look in the mirror and cry (and cry)
주님, 나에게 무얼 하고 계시는 건가요? Lord, what you're doing to me (yeah yeah)
난 일생동안 당신을 믿고 살아왔어요. I have spent all my years in believing you
하지만 주님, 저는 전혀 마음의 안정을 얻지 못했어요. But I just can't get no relief, Lord!
아침에는 거울 속에 남자 얼굴이 보이다가, 저녁에는 여자의 얼굴이 보인다면, 또 얼굴에는 콧수염이 있는데 여자 치마를 입고 있는 사람이 보인다면, 과연 누가 그에게 사랑할 사람을 찾아줄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머큐리는 끝없는 혼동과 외로움 속에서 그의 노래를 통해 하나님께 절규한다. '오 하나님 나는 누구인가요?' 안타깝게도 하나님은 그 질문에 대답할 책임이 없다. 아담의 타락이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듯이 머큐리의 성적 정체성에 대한 혼란도 하나님의 실수나 책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책임은 그 선택을 한 프레디 자신과 성적인 혼동을 조장하는 사람들, 현대 세속문화에게 있다.
머큐리는 "나는 내가 원하는 그 사람이 되고 싶다"(I want to be what I want to be)고 말한다. '내가 원하는 그 사람'은 누구일까? 내가 태어날 때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모든 것, 다시 말해 나의 재능과 나의 성애(sexuality)가 제대로 발현되어, 그 안에서 이 세상에 독립적으로 서게 된 '나'라는 한 명의 독특한 개인이 아닐까? 공적인(public) 삶에서도 자아실현을 하고, 사적인(private) 삶에서도 나의 정체성을 실현한 사람이 아닐까? 나도 그런 사람이 되길 원하고, 하나님도 그것을 원하신다. 이 영화를 보고 기독교인은 반성을 하는 것이 옳다. 우리는 불신자들처럼 자녀들에게 공적인 삶에서 자아실현만을 강조해오지 않았는가? 사적인 삶에서의 자아실현에 대해서도 우리가 교회와 가정에서 제대로 가르쳐 왔던가? 사랑, 성애, 결혼은 사실 성경이 말하는 중요한 가치(value)가 아닌가? 왜 우리는 자녀들에게 이 문제에 대해 더 솔직하고 정확하게 가르쳐오지 않았나? 반성하고, 교회와 가정에서 이 주제를 잘 가르치기로 결단하지 않는다면, 보헤미안 랩소디는 그저 한낱 오락(娛樂)으로 그칠 것이다.
▲김철홍 교수. |
머큐리의 노래는 종종 매우 종교적이다. 그가 종교를 가졌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그가 노래를 통해 인생의 근본적 질문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노래의 어떤 부분은 신과의 대화로 들린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Who wants to live forever?"라는 노래는 기독교인 입장에서 들어도 가슴이 좀 저리다.
누가 영원히 살기를 원하는가?(2번 반복) Who wants to live forever?(2X)
우리에게는 아무런 기회도 없다. There's no chance for us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다 결정되어 있다. It's all decided for us
이 세상은 우리에게 단지 단 하나의 달콤한 순간만을 따로 떼어놓았을 뿐이다. This world has only one sweet moment set aside for us
45세에 병들어 죽은 그의 짧은 삶이 너무나 안타깝다. 그가 행복하게 살았더라면, 더 나아가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영화를 보는 내내, 그리고 보고 나서도 한 동안, 그의 영혼과 삶에 대해 깊은 아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사족: 전체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이 자신의 자아를 실현하는 삶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자유를 지켜야 하고, 전체주의 세력에 우리는 맞서 싸워야 한다).
김철홍 교수(장신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