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ancouver Institute for Evangelical Worldview, 이하 VIEW)이 창립 20주년을 맞았다.
VIEW는 지난 1997년 11월, 기독교대학설립동역자회를 전신으로 하는 기독학술교육동역회(Disciples with Evangelical Worldview, DEW)에서 양승훈 교수(경북대)를 캐나다에 파송하면서 시작되었다. DEW는 각 전공 학문에 대한 기독교적 조망을 가진 학자들을 훈련시키는 일이 기독교 대학을 설립하고 그 정체성을 지속하는 데 필수적이라 생각하고, 기독교 세계관을 연구하고 훈련할 소규모 대학원 겸 연구소를 설립한 것이다.
1998년 11월 3일, VIEW는 트리니티웨스턴대학(Trinity Western University) ACTS 신학대학원과 기독교세계관 문학석사 과정(MACS-WSK)을 개설하는 협정을 맺으면서 공식 출범했다. 2002년 7월 기독교세계관 단기교육 과정 기독교세계관 디플로마과정(DipCS-WSK)도 개설했다.
이후 20년이 지난 2018년 7월 16일, 서울 한양대 20주년 기념식에서는 지난 20년간 VIEW를 이끌었던 양승훈 원장이 원장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후에는 전성민 학장이 원장직을 맡아 VIEW의 발전을 이끌 예정이다. 본지는 지난 17일 서울 동교동 평화다방에서 두 사람을 만나 VIEW와 한국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지난 20년을 되돌아보고 미래를 전망하는 시간을 가졌다.
-먼저 VIEW의 지난 20년을 간략히 평가해 주신다면.
양승훈: 지난 20년 동안 VIEW가 어떤 일을 했는지 보다 먼저 세계관 운동이 왜 시작됐는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차 필요는 한국교회에 만연한 이원론적 행습(行習, 몸에 밴 습성)을 탈피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를 처음 시작했던 사람들이 젊은 교수들과 대학원생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1차적으로 고민했던 바는 기독교 따로 학문 따로가 아니라, 학문을 기독교적으로 할 수 없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학문의 문제뿐 아니라 우리 삶 전반의 문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업과 신앙, 과학과 기독교 등 '무엇과 신앙' 등으로 표현되는 것들입니다. 이러한 이원론적 행습이 VIEW를 통해 얼마나 개선되었는지에 대한 구체적 통계는 없지만 이원론적 삶에 대한 문제의식(awareness)이 확산된 것은 분명합니다.
VIEW는 비록 멀리 캐나다에 있지만 여러 문서나 졸업생들의 활동, 교육 내용 등을 통해 세계관 운동이 확산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또한 지금도 하고 있다고 봅니다. 지난 7월 16일, VIEW 20주년 기념식 때 보셔서 아시겠지만 세계관 운동의 다양한 영역에 VIEW 출신들이 참여하고 있다는 데서 나름대로 VIEW가 세계관 운동의 확산에 기여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전성민: 지난 20년간 VIEW는 싹을 틔우고 뿌리를 든든히 내렸습니다. 여러 졸업생의 사역을 통해 VIEW의 열매을 봅니다. 동시에 앞으로의 시간은 든든히 내린 뿌리위에 더욱 건강한 줄기와 다양하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여기저기서 기독교 세계관을 이야기하지만, '닿을 듯 닿지 않는' 개념 같기도 합니다. '신앙과 학문의 통합'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 의문도 생깁니다.
양승훈: 어떤 차원에서 기독교 세계관을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기독교 세계관을 말 그대로 하자면 '기독교적으로 세상을 보는 관점'이지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세계관 운동은 네덜란드 신칼빈주의자들이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성경 전체의 메시지를 '창조-타락-구속'으로 압축했습니다. 그들은 이를 오늘날 사회나 주변 세계, 그리고 자기 자신을 조망하는 중요한 렌즈로 보고 이를 통해 다양한 이슈를 조망하고자 했습니다.
성경은 내용이 방대하고, 저자도 많고, 장르도 다양하고, 긴 시간에 걸쳐 쓰여졌기에, 전체 내용을 몇 가지 원리로 압축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네덜란드의 신칼빈주의자들이 '창조-타락-구속'이라 는 3가지로 압축한 것은 놀라운 직관입니다. 가장 넓게 말하자면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이러한 '성경적 원리 위에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을 세우자는 운동'입니다.
이처럼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기독교 세계관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자구적(字句的) 의미부터 가장 넓은 의미까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을 성경적 원리 위에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을 세우자는 운동으로 정의하자면 여기에는 시효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느 한 시대에 유행했다가 사라지는 운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성민: 같은 내용을 조금 다르게 표현하자면,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말에서 '기독교', '세계', '관'을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먼저, '관(觀)'입니다. 누구나 관점을 가질 수밖에 없고, 그래서 관점이 중요합니다. '세계'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우리가 성찰해야 하는 대상이 좁은 의미의 신앙 생활뿐 아니라 세계와 모든 것이라는 말입니다. '기독교'라는 말은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기독교적'어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적'이라는 것은 성경에 토대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세계관'의 세 요소를 통해 그 의미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세계관을 제 표현으로 설명해 보라면 '마음과 몸에 배여 있는 판단과 결정의 틀'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예전 3부작'을 쓴 제임스 K. A. 스미스의 주장을 담고 있는 표현인데요. 생각하기 전에 마음과 몸에 배여 있어 습관이 되어버린 판단과 결정의 틀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양승훈 교수(왼쪽)는 "종교적 냄새가 나지 않는 영역까지, 신앙이 중요하다는 사실이 일반 성도들에게도 널리 퍼져 있다는 점이야말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영향 아니겠는가"라고 말했다. ⓒ이대웅 기자 |
-VIEW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우리 교회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다고 보시나요.
양승훈: 가장 실제적 영향이라면,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삶의 영역이 교회만이 아니라는 점을 의식하게 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일반 성도들이 교회 바깥, 종교적 냄새가 나지 않는 영역까지 우리 신앙이 중요하다는 점을 깨닫게 된 것은 세계관 운동의 영향이라 생각되고 여기에 VIEW가 상당한 기여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세계관은 모든 삶의 분야에 적용되는 개념이지만 특히 이의 조망을 많이 받은 분야가 몇 군데 있습니다. 세계관 운동이 시작된 네덜란드에서부터 그랬는데, 바로 교육과 정치입니다. 교육 부문에서는 기독교 세계관 운동으로 인해 많은 기독교 학교들이 생겨났고, 기존의 학교들의 커리큘럼 내용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이는 네덜란드부터 북미, 남아공, 영국까지 각자 다른 형태로 나타났고, 우리나라는 대안학교들 중에 그 영향을 받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정치 분야는 아브라함 카이퍼가 학자이자 정치가였기 때문에 네덜란드에서 강한 영향을 끼쳤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세계관 운동을 통해 분야마다 성경적 조망을 하려는 단체들이 많이 설립되었습니다. 기독경영연구원, 기독교윤리실천운동 등을 예로 들 수 있고, 문학이나 예술 분야에서도 기독교 세계관적 조망을 위한 단체들이 생겨났습니다. 특히 음악은 원래부터 기독교와 가까웠지요.
철학 같은 학문 영역뿐 아니라 요즘에는 일터신학처럼 직업과 윤리 등에서도 교회 안팎에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이런 운동들이 일어나는 데 VIEW가 직접적인 기여를 했다기보단, 세계관 운동을 위해 모인 다양한 분들이 자기 영역에서 세계관적 시도를 함으로 세계관 운동이 확산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성민: 하나만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주일에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지만, 나머지 월-토요일에는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들이 6일간 살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한국교회의 답은 '전도'였습니다. 교회 버스 안에 쓰여있는 '승차하면 기도, 하차하면 전도' 라는 표현이 대표적이지요.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추구하는 방식이 좁은 의미에서의 복음전도뿐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드러내는 일 자체, 그리고 공평과 정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체현이 평일을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에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세계관 운동이 확인시켜 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도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 세계에 참여하는 길이 있고, 그것이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변화도 있지만 눈에 안 보이는 그러나 분명한 '누룩'의 변화도 있는 것 같습니다. '발효'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한 변화이지요.
-그렇다면,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일반 지성인들 세계에도 영향을 끼쳤을까요.
양승훈: 전반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봐야 합니다. 세계관 운동 자체가 지성 운동으로 시작됐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영어를 읽을 수 있고, 호기심과 열정이 강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시작됐습니다. 그러니 교육 분야로부터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확산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순서입니다.
일반 교육 분야는 아니라도, 적어도 기독교 정신으로 설립된 중·고교들에는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어떻게든 교육부의 가이드라인을 따르면서도 성경적 세계관을 반영하려고 애쓰는 학교들이 많습니다. 더구나 대안학교는 그런 부분에서 자유롭기에, 좌충우돌하면서도 기독교 세계관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저희 VIEW가 있는 캐나다 브리티시 콜롬비아 주는 인구가 약 500만 명이고 기독교 학교가 많은데, 이들 중 40개 학교 정도가 기독교 세계관적 커리큘럼으로 교육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이처럼 네덜란드와 캐나다, 미국과 우리나라 모두 기독교 세계관의 가장 직접적인 적용 분야는 역시 교육이고, 이를 통해 학자 그룹들에까지 확산되고 있습니다.
일반 지성인들에게 있어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적어도 '기독교인들은 꽉 막힌 이들이 아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는 인식을 제공했습니다. '모든 진리는 어디서 누가 발견하든, 하나님의 진리'라 는 것은 중세 때부터 내려온 오랜 모토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크리스천 학자들도 어떤 학문을 추구할 때 훨씬 열린 마음을 가지는 것이 가능합니다.
▲전성민 교수(오른쪽)는 기독 세계관(지성) 운동이 일반 영역에 영향을 미친 사례로 "강영안 박사님 같은 경우 일반 철학계에 영향을 끼치셨고, 월터스토프와 알빈 플랜팅가 등도 마찬가지"라고 답했다. ⓒ이대웅 기자 |
개인적 이야기를 하자면, 저는 한국에서 사범대 교수(물리교육과)를 오래하면서 과학을 자연적, 자충족적 존재로 보기보다 '하나님의 피조물'로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하나님의 피조세계에 대한 연구이기 때문에, 기술이나 과학도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구성한다는 것은 기독교의 기본 전제이지요. 그러나 오늘날 과학의 위력이 너무 커졌기에, 과학을 신성화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에서 '과학을 인간화(humanizing science)'하는 작업을 했었습니다. 과학은 인간의 구성물이고 사람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과학교육에 과학사를 도입하고자 했습니다. 과학이 피도 눈물도 없는 기계의 작업이 아니라 사람의 산물임을 일깨우려는 의도였습니다. 과학자들도 연약하고 보통 사람들처럼 일상사 때문에 고민하는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인간을 통해 발전된 과학의 역사를 학생들로 하여금 과학자들의 발견의 맥락 속에서 가르치자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과정을 (제 표현입니다만) '과학을 인간화'하는 것이라 불렀습니다.
과학의 자충족성(自充足性)이나 가치중립성을 부정하는 것은 그 속에 전혀 기독교적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굉장히 기독교적인 연구 주제입니다. 제가 과학사적 학습지도에 대한 연구결과를 발표한 뒤로 한국 과학 교육학계에서 '과학에 대한 역사적 교육법'이 시작됐습니다. 밴쿠버로 떠나면서 저는 더 이상 과학교육에 참여하지 못했지만, 이를 시발점으로 지금도 많은 분들이 과학사를 과학교육에 도입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도는 연구자가 예수 믿고 안 믿고와 관계없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모든 학문적 주제를 모두 이런 식으로 접근할 수는 없겠지만, 분야마다 기독교적 냄새 없이도 기독교적 가치를 반영할 수 있는 주제들을 찾아보면 분명 있습니다.
전성민: 여기에 역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기독 지성 운동을 한다고 했을 때, 기독교적 표현이나 가치들을 기독교적 용어로 명시화할수록 일반 지성 운동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언뜻 보면 기독 지성과 무관해 보이지만, 기독교적 세계관을 암묵적으로 표현할 때 오히려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지요.
양승훈: 그 대표적 예가 기독교 문학입니다. 이번에 한국 와서 <반지의 제왕>을 사서 다시 읽는데, 소설이 많은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메시지가 명시적일수록, 굉장히 제한된 사람들에게만 접근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문학은 그래선 안 되고, 암묵적으로 기독교적 정신만 깔고 써야 합니다. 명시적으로 기독교의 용어를 사용하면 그야말로 '프로파간다'가 됩니다. 꼭 기독교 용어를 사용해야 기독교 진리가 표현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전성민: 문학도 그렇지만 다른 예술 분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 학교에 사진 작가이신 분이 입학하셨습니다. 이유를 들어보니, 기독교인으로서 기독교 예술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추구해 보기도 했는데 그것이 무엇일까 답을 찾기 위해서였다고 하시더군요.
기독교 예술을 추구할 때 창의력이 사장되는 경우가 있는데, 과연 그것이 전부일까, 기독교 세계관이 상상력과 창의력을 더 풍성하게 하는 길을 없을까. 이런 고민을 가지고 저희 학교에서 공부하셨지요. 기독교 세계관을 좁은 의미로 해석하면 도식화되거나 환원돼 버립니다. 이것이 기독 지성 문화 예술 운동의 역설적 면모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