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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란 무엇인가? 한국 다리놓는 사람들의 박정관 목사는 "우리의 예배 가운데 예배가 회복되어야 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지난 주일 당신은 예배에 참석했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쉽지만, "그 예배 모임 가운데서 당신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했습니까?"라는 질문에는 대답하기기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모든 교회는 예배하는 공동체입니다. 간혹 지역봉사를 하지 않거나 성경공부를 하지 않는 교회도 있습니다. 심지어 전도나 선교를 게을리 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교회라는 이름을 단 이상 예배하지 않는 교회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막상 예배가 무엇인지 물어보면, 잘 모르고 있거나, 하나님께 의무적으로 드려야 하는 종교적 행위로만 생각하는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모든 교파와 교단을 초월해서 예배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견해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과의 만남 가운데 이루어지는 계시와 응답"이라는 것입니다. 즉 예배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만나는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며, 그의 백성들은 응답하는 것입니다. 좀더 쉽게 예배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접근해 보겠습니다. 자매들이 어느날 갑자기 예뻐지면 연애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형제들이 갑자기 멋을 내고 차를 청소하면 틀림없이 연애하는 것입니다.

상대를 기쁘게 하려고 선물도 주고 편지도 쓰고 시를 써서 읽어주기도 합니다. 밤이고 낮이고 그 집앞을 찾아가기도하고, 때를 얻던지 못얻던지 데이트를 하고자 힙씁니다. 이제는 헤어지는 시간이 너무나 아쉬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 비로서 두 사람은 결혼하게 됩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사랑에 빠지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늘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이 내 삶의 중심이 되셨으며, 하나님 안에서 내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 삶의 방식이 되어 살아가는 그가 바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2 예배 - 원어적 고찰 원래 영어 단어 예배 (worship)는 앵글로 색슨 (Anglo-Saxon)족의 단에에서 온 것으로서 worth 와 ship 의 합성어 입니다. 그 의미는 "가치를 어떠한 대상에게 돌린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를 거룩하신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사용할 때는 "최상의 가치를 최고의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1) 예배는 하나님께 대해 반응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동사 "샤하(shachah), 하와(chawah)" (창 18:2, 시 99:5), 헬라어 동사 "프로스퀴네오 (proskuneo)" (요 4:23)는 절하다, 몸을 굽히다, 엎드리다, 혹은 입을 맟추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 엎드려 절하고 입을 맟추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합당한 반응인 것입니다.

2) 예배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동사 "아바드(abad), 샤라트(sharat)" (신 10:12, 대상 16:4)와 헬라어 동사 "라트류오(latreuo) 라트레이아(latreia)" (마 4:10, 롬 12:1, 행 13:2)는 "노예나 종이 주인을 섬긴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주인이신 그분을 섬겨야 합니다.

3) 예배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입니다. 히브리어 동사 "야레(yare)" (렘 32:38-40, 신 6:13)와 헬라어 동사 "세보마이 (sebomai)" (마 15:8)는 "경외함, 존경"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위엄 앞에 한없는 존경의 마음을 올려드려야 합니다. 이렇게 예배의 어원과, 성서적 정의를 살펴보면 우리는 예배가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 예배는 동사이다. (로버트 웨버 Robert Webber) 성서적 예배는 그리스도를 영접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해야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훌륭한 예식을 드리는 것을 뛰어 넘어, 예배자 자신의 삶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3. 예배는 인간 창조와 구원의 목적입니다 (Dr. David H Jung - Liberty University).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창세기 1:26-27). 많은 의미가 있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막힘없이 소통하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인 아담과 하와에게 손수 지으신 땅의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창세기 1:28). 이를 위해 하나님과의 막힘 없는 교제와 소통은 너무나 당연하고도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모두 이루어 드려 그 마음을 시원케 할 자들로 우리를 지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명령을 받고 수행하는 관계가 아니라 사랑하고 깊이 교제하는 관계를 의미합니다 (Erickson, Millard. Christian Theology. The image of God 참고).

최초의 인간은 하나님을 그 삶의 중심으로 삼고, 그분의 뜻과 계획을 이루기 위해 하루하루 그분과 교제하고 사랑의 대화를 나누는 존재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예배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의심하여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을 피하였습니다 (창세기 3:8).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파괴된 것입니다. 타락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종살이 에서 구원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파라오 앞에 목숨을 걸고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내 백성을 내보내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전하였습니다. 내보내야 하는 이유는 여호와의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출 3:12; 7:16; 8:1,20; 9:1,13; 10:3)

[출 8: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바로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수많은 선지자들의 피를 아낌없이 이땅에 흘리신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바로 이 깨어진 관계, 즉 예배를 회복하기 위해서 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생을 주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왜 구원하시고 영생을 주셨습니까?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여 예배가 가능하도록 하기 위한 시작으로 구원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이땅에 보내어 죽이셔서 이루고자 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한 구속의 사역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께 찾아 드리셨습니다. 예배자들을 찾으시는 하나님은 먼 곳에서 방관하시며 기다리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삶 가운데 찾아 오시는 분이십니다. 99 마리의 양들을 들판에 버려두고 잃어진 한 마리 양을 찾고자 온 산을 헤메이는 목자이십니다.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땅에 찾아오신 하나님의 성육신 사건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예배자들)를 애타게 찾으시는지를 우리에게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4. 예배는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으로 인하여 존재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로 인한 회복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새롭고 산 길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 예배는 궁극적으로 우리의 이익을 위해 실행되어서는 안되며 하나님을 위해서만 실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예배가 예배로서의 참된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예배의 대상이 될 뿐 아니라 예배의 두 요소인 성령과 진리를 제공하시어 예배를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배를 주도하시기 때문에 예배는 하나님의 전적인 사역인 것이며, 다만 인간은 거기에 반응하고, 섬기고, 경외하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기는 것 (The chief end of man is to glorify God and to enjoy Him forever)"이라고 인간 존재의 목적에 대해 분명히 하였습니다.

5. 예배는 전적으로 하나님 중심이어야 합니다. 만약 인간 중심이 될 때 예배는 무속행위나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하나의 종교행사로 전락해 버리게 됩니다.

오늘날 팽배한 인간 중심의 예배의 모습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 자신의 물질 축복을 구하기 위한 예배

- 정신적, 정서적 불안을 해결하기 위한 예배

- 영적 자기 만족이나 신비한 체험을 얻기 위한 예배

- 자신의 문화적 생활의 한 방편으로 드리는 예배

- 다른 사람들과의 사교를 위해 드리는 예배

- 자신의 병고침을 위해 드리는 예배

- 교회의 음악과 분위기가 좋아서 드리는 예배

A. W. Tozer 는 "누구든지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을 그 수단으로 찾는 자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김진호 목사: 숨겨진 보물 예배: 예수 전도단)라고 했습니다. 이런 자기 욕심을 위해 예배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는 예배가 세속화되고 일종의 쇼와 같은 것으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배를 경험하지도 못했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알지도 못하며, 자기 중심성위에서 예배하기 때문에 자신의 편협한 잣대를 가지고 예배의 형식과 문화적 요소들에 대한 논쟁이나 불평을 늘어놓게 되는 것입니다.

6. 공중예배 (Corporate worship)는 성도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기초가되는 예배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자녀들이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정해신 시간과 장소에 모여 성령안에서 함께 하는 예배입니다. 우리는 이것은 '공중 예배' 혹은 '예배 모임'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성 삼위 일체 하나님께서 공동체로 존재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이는 공중예배는 예배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초대교회는 핍박가운데도 모든 연령의 모든 성도들이 한 믿음을 고백하는 축제로서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성막과 성전이 그들의 삶의 중심이었던 것처럼,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도 예배가 그들의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들은 안락한 집을 포기하고 지하무덤 (카타콤)에서 예배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수 없이 많은 성도들이 함께 모여 예배하는 것 때문에 발각되어 잡혀가서 사나운 동물들에 뜯어먹혀 죽어가면서도 그들은 결코 모이기를 폐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목숨을 걸고 드리는 예배가운데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쳐났던 것입니다. 머리와 몸이 떨어질 수 없듯이, 머리이신 예수님의 몸으로서의 공동체적 교회는 반드시 함께 모여 예배해야만 합니다. 공중예배 가운데 우리가 섬기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됩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자신의 선입견과 좁은 지식으로 믿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생각의 틀에 가두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때 새롭게 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성화되어갈 수 있습니다.

좌우에 날 선 검과 같은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심령과 골수를 쪼개도록 내어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들은 말씀에 합당하고 정직하게 반응하여 한주간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공중예배 가운데 단 한 사람도 구경꾼일 수 없습니다. 기존의 우리의 생각을 운동경기에 비교하면 목회자(순서의 담당자)는 선수로, 성령은 코치로, 성도들은 관중으로 이해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팀 플레이를 하는 선수들입니다. 목회자들은 코치로써 성도들이 예배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끝으로 성령께서는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Dr. Vernon Whaley - Liberty University). 공중 예배 가운데 우리는 각각의 은사대로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합니다. 성가대와 찬양단으로, 안내와 헌금위원으로, 그리고 식사준비와 섬김을 통해서 주신 달란트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지체들을 섬깁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상의 것으로 준비하여 최고의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가운데서 우리는 우리의 은사를 갈고 다듬고 재발견하여 하나님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7. 삶의 예배(Life style worship)는 공중예배의 결과입니다. 공중 예배를 통해 받은 말씀, 그리고 주신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고백한 찬송과 기도와 결단은 삶 가운데서 반드시 실천되어야만 합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예배를 "어떠한 지정된 공간에서 성도들이 함께 모여 절대자이신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의식적 행위"라고만 생각합니다. 이것은 비기독교인들이 볼 때 좋은 정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정의는 예배를 하나의 종교적인 의식으로 전락시켜 버릴 수 있습니다. 위의 정의는 두가지 측면에서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예배의 공간은 온세상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예레미야 23:24)

하나님께서는 온땅에 충만하신 분이시며,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는 그 어떤 공간도 인간이 예배 할 장소가 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23:24).

우리의 일터도, 학교도, 퇴근 길도, 차동차도, 가정도, 바다와 산과 들과 우주도 예배의 공간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예배는 의식적 행위가 아닙니다. 구원받은 사람의 삶 자체가 예배(Life style worship)입니다. 이것은 늘 하나님과 동행하며 대화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삶에서 실천되지 않는 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는 이벤트나 콘서트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지속적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공중예배 시간에만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행동하고 일주일 간의 삶 속에서는 하나님과 관계 없이 살아간다면 그 예배가 아무리 완성도를 가지고 있고, 감동적인 의식이었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을 역겹게 하는 이중적인 종교행위인 것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곳에 계신 하나님 앞에, 잘 차려진 종교 예식을 드림으로 우리가 예배하는 삶을 사는 것처럼 위장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잘 차려진 제사상을 찾는 귀신이 아니라 그의 온 삶을 통하여 예배하는 사람들에게 모든 영광과 존귀와 사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공중 예배(Corporate worship)와 삶의 예배(Life style worship)는 반드시 병행되어져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의무이기 이전에 온전한 예배 자체가 지니는 특성입니다. 공중 예배와 일주일 동안의 삶의 예배가 합쳐져야 진정한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8.예배와 선교 (전도) 미국을 대표하는 유명한 설교가 존 파이퍼(John Piper)는 예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선교가 존재한다고 합니다 (Mission exists because worship doesn't). 즉 예배가 없는 곳에 예배가 존재하도록 하기 위해 선교가 존재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배가 선교의 목적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목적과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 입니다. 선교는 임시적으로 존재하지만 예배는 영원히 존재합니다. 하늘나라에 가서 우리는 선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계시는 그곳에서 우리는 영원히 예배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성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참 예배자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께서 나를 위해 하신 놀라운 일들을 알게 됩니다. 결국 그분의 뜻에 따라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삶의 예배와 공중예배가 균형잡혀서 우리 삶과 교회 가운데서 실현될 때 우리는 선교(전도) 라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됩니다. 비로서 예수께서 "천국은 누룩넣은 반죽과 같다"고 하신 말씀을 실제적으로 경험하며 실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8. 예수 그리스도의 예배에 대한 가르침.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살펴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4:21-24 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우리는 이 말씀을 주목해서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통틀어 예수님께서 예배에 대해서 가르쳐 주신 유일한 본문이기 때문입니다. 이 산은 사마리아인들이 예배드리던 그리심산 입니다. 저 산은 시온산의 예루살렘 성전을 의미합니다. 공간과 전통에 구애 받지 말고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2 절에서 '너희'는 사마리아인들을 의미하고, '우리'는 유대인을 의미합니다. 왜 사마리아인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 즉 유대인은 아는 것을 예배한다고 하셨을까요?

당시 사마리아인들은 모세오경만 읽었고, 유대인들은 모세오경을 포함하여 시편과 선지서를 읽었기 때문이라고 추측 됩니다. 즉 사마리아인들에게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정보가 충분히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유대인이었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차원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때가 이른다고 주님은 이야기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려면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예배의 원리입니다. 영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를 가장 잘 아시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의 임재 가운데 예배해야 합니다. 진리는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또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고, 예수님님께서 그 모든 말씀을 성취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올바로 예배하려면 성령안에서 성령의 주도하심 가운데 예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올바로 예배려면 말씀에 근거하여 예배 해야 합니다. '영'에 지나치게 치우치면 맹신적이고 광란적인 예배를 하게 되고, '진리'에만 치우치면 머리로만 드리는 형식적 예배를 하게 됩니다. 우리는 영과 진리의 아름다운 조화 가운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예배 드린다"고 하지 않으시고 "예배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전통적으로 쓰는 예배 드린다는 표현은 경외심을 나타내는 공손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예배가 '동사'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특정 시간에 특정 예식을 올려드리는 것으로 우리의 예배를 제한하는 오해를 일으킵니다. 마귀는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고 세상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원형으로 바꾸어갈 이 엄청난 특권인 예배를 그저 일주일에 한시간 교회에서만 드리는 것, 그것도 그저 앉아서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으로 오해하게 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 전체로, 우리가 살아 숨쉬는 매 순간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바울은 강력하게 꾸짖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린도전서 3:16).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우리에게 성령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내주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특별한 시간과 장소에서만 예배한다고 하면, 우리 삶을 주도하도록 내어 드리지 않고,특정한 시간에, 예식과 제물만 올려드린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전혀 무시한 채 이교도적인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14 절에 주님께서는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원토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샘물은 우리 속에서 영원토록 끊이지 않고 솟구치는 샘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특정 시간 특정 장소에서 형식적 예배만 드린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주시는 영원한 특권, 결코 목마르지 않는 신비한 특권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은 죄 많고 하나님의 말씀을 아직 잘 모르는 사마리아 여인과 같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 성령과 진리로 영원토록 아버지를 예배할 때가 오는데 곧 지금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신다."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며 정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온 우주와 만물을 지으시고, 모든 존귀와 영광을 가지신, 절대로 부족함이 없으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이 있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선하신 아버지께서는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성령과 진리로 영원토록 끊임 없이 예배하는 예배자들을 지금도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주일 경건한 몸과 마음으로 예배 모임에 참여합니다. 그러나 그것 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일주일 동안 진정한 예배자의 삶을 살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오늘 나는 예배를 통해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했는지, 오늘 하나님의 임재안으로 나가 그분을 기뻐하고 찬양했는지, 죽을 죄인인 나를 살려주신 그 크신 은혜에 감사의 눈물을 흘렸는지, 그분의 사랑안에 빠쳐 안식을 누리고, 그분의 세미한 음성을 들었는지, 그 음성을 듣고 어떻게 살기로 응답했는지를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창조되어진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기쁨이 넘쳐나는 행복한 삶, 이 땅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을 이루어드리는 대견한 자녀의 삶을 살도록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마가복음 12:30)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중 예배에서, 그리고 우리의 일상의 삶 가운데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께 그런 예배자들이 되어 드리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 한인철 목사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