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만난 친구 목회자가 학위논문을 썼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무엇에 관한 논문이냐 물으니, “사영리 구원의 문제점”에 관한 글이라 하였습니다. 친구는 신자와 불신자의 삶이 별반 구별이 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사영리를 이용하여 몇 분 동안에 얻은 가벼운 믿음, 곧 경신(輕信)의 문제 때문이 아닌가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교회가 한참 부흥하던 우리나라의 1970년대는 사영리(四靈理)라는 작은 소책자를 사용하여 전도를 하였습니다. 전도교육에 이 “네 가지 영적 원리”라는 소책자를 사용하였고, 한국대학생선교회(CCC)라는 단체는 구원을 점검하는 데, 신앙의 문턱을 넘어가는 도구로 오랜 동안 사용하였습니다. 이 책자 마지막에 믿음을 선택하는 기도문을 읽으며 결신하도록 도왔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한다”고 하였습니다.
요즈음에는 “영접하는 것 곧 예수의 이름을 믿는 것”이 제대로 되었는가를 다시 묻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 전혀 세상과 구별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는다면서, 소위 “거룩한 믿음”과는 상관없이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구원받은 것인가” 물어보아야 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이 믿는 것은 곧 영접하는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선택은 “영접”(receive)하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것은 “취하다, 잡다, 붙들다”라는 의미의 “람바노”(lambano)라는 동사와 또한 “인정하다, 좋아하다, 친밀하게 되다, 교제하다”라는 의미의 “파라람바노”(paralambano)라는 동사를 사용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은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붙들며, 교제하고, 인정하며, 좋아하고 연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그리스도 예수를 왕으로 영접하여 아버지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접하여 구원 얻음을 그림언어로 표현하면 첫째, 영원하신 왕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맞아들이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는 어둠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 방주를 신뢰하여 그 배에 타는 것입니다. 차가운 밤바다에서 죽어가는 사람에게 불타며 가라앉는 배와 구원의 방주가 있다면 무엇을 선택할지는 명확한 일입니다.
새로운 왕국에 들어간 사람이 마음대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구원 방주에 이른 사람이 선장을 무시하고 멋대로 행동할 수 없습니다. 너무 고마워서라도 왕을 섬기거나, 선장을 도우며 은혜를 갚으려고 할 것입니다. 믿음은 정보의 습득이 아니라 중대한 결단입니다. 거기에는 행동의 열매가 따릅니다. 믿음과 영접은 반드시 행동이나 실천을 낳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