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사람에게는 없고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있는 나쁜 것 중에 하나가 근심(걱정,염려)이다.'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잠15:13) 이 말씀에서 근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앗체베트'는 '괴롭히다, 고통을 주다'에서 유래한 '상처, 고통, 아픔, 근심, 슬픔'을 의미한다. 근심은 현재 당면한 문제나 아직 도래하지 않은 장래 일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근심, 염려, 걱정은 같은 말이다. 이것들이 자라면 두려움이 되고 우울증이 된다. 세상에서 성장 속도가 가장 빠른 것 중에 하나가 근심이다. 우리에게는 근심거리가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온다. 환경이 주는 근심이 있고, 사람이 주는 근심이 있다. 현재 근심이 있고 장래 근심이 있다. 다른 사람이 주는 근심이 있고, 내가 만든 근심이 있다. 불행한 인생을 원하지 않는다면 마음에 근심의 씨를 뿌리지 말아야 한다. 마음에 근심의 씨를 뿌리는 자는 마귀이다. 우리가 할 일은 마귀가 근심의 씨를 뿌리는 것을 방치하지 않는 것이다. 근심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또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속고 있는 것이다.
근심의 원인 가운데 가장 일반적이고 많은 것은 내가 만든 근심이다. 야곱에게는 열두 아들이 있었다. 형제간의 불화로 야곱에게 큰 근심이 발생한다.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잃게 된 것이다. 그들이 사는 가나안 땅에 유래 없는 흉년이 들어 양식을 구하러 아들 열 명이 애굽에 갔다. 막내인 베냐민은 아버지 야곱이 보내지 않았다. 애굽에 내려간 야곱의 아들들은 생각지 않은 애굽총리를 만나게 된다. 요셉은 형들을 알아보았지만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다. 형들에게 양식을 판 요셉은 형들 중에 한 명을 볼모로 잡고 베냐민을 데리고 와서 정탐꾼이 아닌 것을 증명하라고 말했다. 야곱의 아들들이 돌아가서 야곱에게 이 사실을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야곱은 "너희가 내 자식들을 잃게 하는 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까지 빼앗아 가고자 하느냐 너희가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 탄식했다. 우여곡절 끝에 베냐민을 데리고 다시 애굽으로 내려 갔다. 베냐민을 만난 자리에서 요셉이 부하에게 "이 사람들을 집으로 안내하고 짐승을 잡고 준비하라. 이 사람들이 나와 함께 식사할 것이다"라고 지시했다.
이 말을 들은 요셉의 형들은 두려워 떨면서 말했다."이는 우리를 억류하고 달려들어 우리를 잡아 노예로 삼고 우리의 나귀를 빼앗으려 함이로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야곱과 그 아들들에게 일어난 일의 전후 사정을 안다. 그 사정을 아는 입장에서 보면 야곱의 말이나 요셉의 형들의 한 말은 틀린 말이다. 그들이 처한 상황과 현실은 그들이 말한 것과 같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상황을 그렇게 해석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해석을 사실로 받아들였다. 그 결과로 야곱은 원망하며 분노했고 요셉의 형들은 두려워 떨고 절망했다. 이것은 야곱의 소설, 요셉 형들의 소설이다. 야곱과 요셉의 형들은 사실이 아닌 자신들이 쓴 소설에 근거해 화를 내고 원망하고, 두려워하고 절망했던 것이다. 사실은 요셉이 그 사랑하는 동생 베냐민을 보고 싶어서 데려오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야곱은 소설을 썼다. "너희가 나에게 내 자식들을 잃게 하는 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 사실은 요셉이 형들을 선대하기 위해 집에서 밥을 먹자고 한 것이다. 그런데 요셉의 형들은 소설을 썼다.
"이는 우리를 억류하고 달려들어 우리를 잡아 노예로 삼고 우리의 나귀를 빼앗으려 함이로다." 하나님은 "근심하지 말라. 걱정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고 하셨다. 이것을 소설 쓰지 말라는 것으로 적용할 수 있다. 사람들이 우울해하는 근거가 사실이 아닌, 자신이 쓴 소설인 경우가 많다. 근심하고 걱정하고 염려하는 과정이 소설 집필 과정이다. 그것도 희극 아닌 비극소설을 쓴다. 소설은 야곱이나 요셉 형들만 쓰는 것이 아니다. 오늘도 소설 쓰는 사람이 많다. 사실이 아닌 자신이 쓴 소설에 따라 두려워하고 불안해하고 절망하는 것이다. 소설을 쓰는 기본 동기가 '넘겨짚는 것이다' 몇 가지 자료들을 바탕으로 소설을 쓴다. 사람의 표정을 보고 소설을 쓴다. 통화 중에 들린 낮은 목소리를 듣고 소설을 쓴다. 사실은 배가 아펐었고 감기가 들었었던 것인데 사실과는 상관없이 소설을 써 놓고 힘들어하고 어려워한다. 대부분의 이런 소설의 경우 그 원인이 '나'로 귀착되기 때문이다. 염려가 마귀 역사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대부분의 소설이 마귀 작품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소설은 Fiction이다. 사실(Non Fiction)이 아니라 지어낸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염려는 철저히 소설(Fiction)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람들은 희극소설보다 비극소설을 주로 쓴다. 소설의 대부분은 비극소설이다. 그 결말이 비극으로 끝난다. 병원에서 정기 검진을 받는 중에 정밀 검사를 받아야 할 것 같다는 한 마디를 들으면 그 순간부터 소설 집필이 시작된다. 이렇게 시작된 소설은 대부분 암으로 이어지고 죽음에 이른다. 자신이 세상을 떠난 후에 홀로 남겨질 가족들의 비참함까지 소설 속에 그려진다. 그리고는 이 소설에 근거해서 슬픔과 두려움에 잠긴 삶을 연출하기 시작한다. 사람은 근심거리가 있으면 근심한다. 없으면 안 해야 한다. 그러나 근심거리가 없으면 만들어서 한다. 오늘의 근심거리가 없으면 내일 것까지 갖다가 근심한다. 근심은 도둑이다. 시간을 빼앗아 가고 마음을 빼앗아 간다. 그리고 모든 에너지를 소진시킨다. 백해무익한 근심의 소설을 쓰지 않고 속지 않는 것이 인생을 낭비하지 않는 길이다. 소설은 남이 쓰는것 아니다. 내가 쓴다. 결코 남이 나를 불행하게 만들지 못한다. 내가 나에게 속지 않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