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한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자기 배우자에 대해 후회나 한탄을 자주 한다.
그때 내가 잘못된 선택을 했어...
차라리 그때 그 사람과 결혼했더라면...
성급하게 결정하지 말고 조금만 더 때를 기다려 볼 걸...
이런 식으로 현재의 배우자에 대해 아쉬운 생각을 지니는 경우가 많다. 그도 그럴 것이, 갑자기 사건이 진척돼 순식간에 결혼을 했거나 오래 사귄 사람과 헤어지고 뜻밖의 사람과 갑작스레 결혼을 했을 수도 있다. 또한 그리 운명적인 사랑이라 여겨지지는 않는데 분위기에 떠밀려 결혼을 하고 보니 자기와 맞는 사람은 따로 있는 것 같고, 오다가다 그런 성격을 지닌 이성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래서 지금 배우자는 원래 내 짝이 아닌데 인연과 운명의 뒤틀림 속에 잘못 찾은 것이라고 생각하며 갈증을 느끼곤 한다.
크리스천들도 이런 생각을 꽤 많이 한다.
이 사람이 정말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배우자일까...
내가 배우자 기도를 게을리 해서 제대로 된 짝을 못 만나고 가시밭길을 걷고 있구나...
이런 맞지 않는 배우자를 만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니 대충 해도 내 책임 아니다...
등등... 핑계가 자꾸 생긴다.
내가 아는 형제 중에, 믿은 지 그리 오래되진 않았지만 상당히 열심히 전도하고 하나님 일을 위해 주야로 애쓰는 사람이 있다. 그는 먼 길을 가서 1박 2일 세미나도 참가하고 일터인 가게에도 사람들을 초청해 복음을 전하는 등 온통 주님의 사업 생각뿐이다.
하지만 부인은 그런 일에 크게 관심이 없어서 너무 열성적으로 일하는 남편에게 호응을 보내지 않는다. 아내가 함께하고 도와주면 좋겠지만 반응이 없어서 남편은 늘 외롭고, 매번 혼자 자기 일을 감당할 뿐이다. 스케줄도 아내에게 말하지 않고, 좀 크게 일을 벌인 때에는 일단 저질러 놓고 다툼도 감수하는 모양이었다. 한마디로 따로따로 논다.
한번은 그 형제가 아내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내기에, 아주 상투적인 조언을 했다.
"그래도 하나님이 맺어주신 배우자이니 최선을 다하시고, 전도나 교회보다 가정이 먼저입니다. 그게 주님의 일이고요."
그러자 이 말에 대해 그가 납득을 못 하는 것이었다.
"정말요? 지금 아내가 하나님이 주신 아내라고요?"
그 형제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 하에 이루어진다고는 생각하지만 바로 그 여자를 하나님이 내게 결혼하라고 맺어준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내가 하나님 일 하겠다는데 왜 돕는 배필이 되어야 할 아내는 호응도 않고 방해만 하는가, 하며 의아해하는 것 같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 여성은 하나님께서 주신 배우자가 맞다. 돕는 배필이 아내라지만 그걸 잘 못했다면 그건 아내가 감당할 몫이고 하나님의 책망을 들을 일이다. 그렇다고 아내의 역할이 남편을 돕기만 하는 것은 아니며, 남편의 길이 확실히 옳은 길인지 장담할 수도 없다. 가정을 소홀히 하면서 하는 어떤 일이 주님의 일일까. 그런 일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가정을 깨서라도 자기와 자신들의 교파를 따르라고 하는 이들은, 더 볼 것도 없는 1000% 이단이다. 하나님은 그런 명령을 내리시지 않으며, 그분의 능력이 모자라고 그분의 팔이 짧아서 우리에게 일을 맡기시는 것도 아니다.
또한 사랑은 상대방의 반응에 따라 신실함을 결정하는 것도 아니다. 배우자가 못마땅하다는 사실이 나의 불성실에 정상참작이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인간으로서 힘든 일이지만 내가 할 일만 하면 된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아내이며 우리 신약 성도는 예수님과 정혼한 '한 처녀'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아직 결합하지 못했지만 결혼의 효력이 이미 발생한 관계이다. 그래서 아직 예식도 올리지 않은 요셉이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알고 끊으려 하자 주의 천사가 말하는 것이다.
"네 아내 마리아 취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 1:20)
이미 마리아는 네 아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아내로 그 역할을 잘 감당했는가? 늘 도망 다니고 청개구리처럼 말을 듣지 않았으며 다른 남편을 찾아 음행을 일삼았다. 우리 신약 성도는 어떤가. 예수님과 이미 정혼했지만 우리의 삶은 맘몬과 각종 다른 남편(우상)으로 가득하며 부족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나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히 그 관계를 깨지 않으신다. 아내와 신부의 역할을 우리에게 주시는 이유는 우리도 삶에서 각자의 배우자를 그렇게 대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세상은 결혼을 위해 여러 상대를 만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말하지만 사실 결혼은 일찍 하는 것이고, 이 사람 저 사람 실컷 사귀어보고 저울질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봐야 안 맞고 갈등하기는 마찬가지다. 자족하고 서로 맞춰가야 한다.
사람들은 젊은이들에게 조언한다. 많은 사람을 만나보고 잘 고르라고. 만나 봐야 사람도 알고 올바른 선택도 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래서 지금 세상이 이렇게 되었는가?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우리의 불순종과 결혼에 대한 무개념, 무책임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배우자를 지정하셔서 백 번을 연애해도 결국 그 사람을 만나게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어떤 배우자를 예정해 두셨다거나, 반드시 그 사람과 만나게 된다든가 하는 이야기는 섣불리 단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하나님께서 모든 변수에도 불구하고 둘이 결혼으로 서약하고 한 몸이 되면 그때부터 그들을 하나로 보신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바로 그때부터 그들은 하나님이 맺어주신 부부로 사는 것이다. 말하자면, 돌고 돌아 결국 만난 운명적 지정인이 아니라 그렇게 관계가 맺어진 때로부터 하나님의 결혼에 대한 명령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누군가를 콕 집어주시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자유의지를 무색하게 만드는 일이다. 우리의 결혼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딱 한 가지가 아니다. 어떤 선택을 하든지 최대한 정결한 상태에서 배우자를 빨리 결정하고, 그때부터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봉사를 할 때 그것은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일인 동시에 내가 선택한 일이 된다. 그리스도인의 할 일이 사람마다 정확히 분배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선택하면 그때부터 거기에 충실해야 하고, 그것은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귀한 일이 되고 주님의 뜻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처럼 배우자는 내가 선택하지만 그것이 창세 전부터 정해진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것이 하나님으로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 해도 하나님은 우리의 뜻을 존중하시고, 우리는 자유로운 인격체이다. 선택의 자유는 모두에게 있고, 그것에는 책임이 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게 물었던 그 형제도 하나님이 주신 배필과 함께하는 것이고, 심지어 불신자와 결혼한 사람도 그것이 잘못된 선택이거나 앞으로 교체(?)해야 할 사항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전도하고 섬기며 함께 나아가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꼭두각시가 아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로 하는 순간 그분과 정혼하게 되고 영원히 그분의 신부가 되는데, 그 전까지 우리는 마귀의 자식이다. 마귀의 자식에게는 하나님의 뜻이나 결정된 어떤 사항도 없다. 우리가 그분의 선물을 받기로 응하는 순간 그것은 주님의 뜻이자 우리의 의무이자 성화로 가야 할 책임으로 바뀐다.
이처럼 배우자도 어딘가에서 지정된 사람이 나를 만나기 위해 달려오고 있는 것이 아니라, 둘이 만나 한 몸이 되는 순간 서로에게 하나님이 주신 배우자가 되는 것이다.
[출처: 기독교 작가 김재욱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