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되면 오래 전 아주 어릴 때 산에서 있었던 일이 기억난다. 주일 오후에 아버지와 함께 북한산으로 등산을 갔었다. 자주 가던 곳이었기에 어렸지만 낯익은 길이었다. 하지만 겨울이어서 어린 나에게는 쉽지 않은 길이었다. 눈 위를 걸어 올라가야 했기 때문에 신발 밑에 미끄러짐을 방지하기 위해서 아이젠(Eisen)을 달고 갔다. 그런데 한참을 올라가 성벽을 따라서 올라가야 하는 마지막 오름 길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길이 생각보다 미끄러웠던 것이다. 눈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길이 딱딱하고 반질반질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조금 고민을 하시는 것 같더니만 그냥 올라가자고 하셨다. 그런데 몇 발자국을 더 올라가다가 갑자기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 내려다보니 생각보다 경사가 심했고 되돌아가기 어려운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앞을 보며 아버지보다 앞서 올라가는데 그만 미끄러지고 말았다. 그 때에 아버지가 곧 나를 뒤에서 안았고, 아버지와 나는 함께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잠깐이었기는 했지만 얼마나 떨렸는지 모른다. 다행이도 많이 미끄러지지 않고 길 옆 나무 밑동에 멈춘 후 아버지와 나는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아버지가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웃고 계셨다는 것이다. 그 때 내 마음에 안정이 찾아왔고 아버지와 나는 다시 일어나 신발 밑에 착용한 아이젠을 힘입어 걸어갔다. 하지만 내 마음에는 신발 밑에 아이젠이 아니라, 손을 잡고 같이 올라가셨던 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에 마음 든든했다.
여전히 이곳 미국 동부의 겨울은 춥다. 그리고 눈이 한 번 오면 얼마 동안은 미끄러지지 않기 위하여 조심해야 한다. 그 때 마다 생각나는 것이 아버지가 함께 미끄러져 주신 일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귀한 사랑이 생각난다. 하나님은 내가 혼자서 걸어가는 것 같을 때에도 늘 항상 함께 하시고, 또한 미끄러지려고 할 때에 더 큰 믿음을 가지라고 하시며 웃으신다. 그런데 그 말씀은 구름 위에서 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미끄러져 주시면서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이사야 43장 1-2절)라고 하시며 미끄러질 일이 너무나 많은 세상 생활 가운데 힘을 주신다.
걱정도 많고 괴로움과 외로움도 많은 세상에 우리 모두는 살고 있다. 늘 넘어질 것을 조심하고 살다가 보니 즐거움도 없어진 것 같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걱정할 것 없다. 하나님께서 눈동자와 같이 지켜보고 계시고, 나의 앞과 뒤, 그리고 옆과 위에서 늘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그 증거가 오늘도 내가 건강하게 하루를 보내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은 내가 넘어질 것을 기다리시다가 안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벌써 나를 안고 가신다. 그래서 감사가 넘치고, 평안을 누리며, 오늘도 나에게 맡기어 주신 일을 힘 있게 감당하며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다가 미끄러져도 상관없다. 그것은 실패의 미끄러짐이 아니라 하나님의 깊고 가까운 사랑을 더욱 체험하는 축복의 시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십자가에서 그 사랑의 확신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