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은혜가 품지 못할 자리는 없다"

 

박영선의 다시보는 사사기
박영선 | 남포교회출판부 | 456쪽 | 20,000원

문명은 발달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를 이용해 살상과 폭력에 몰두하고 있다, 성도들은 이럴 때 구약성경 속 '사사기'를 떠올린다.

저자는 서두에서 이 사사기가 '역사서'임을 전제한다. 교훈을 주려고 설득하거나 감상을 전달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는 것. 그렇기에 부끄러울 정도의 온갖 행위들이 냉정하고 무심한 필체로 기록돼 있다. 사사기는 변명하거나 회개하지 않고, 인간의 실패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입다는 이방인들의 풍습대로 서원하다 딸을 잃고, 기드온은 에봇을 만들어 범죄의 불씨를 남기며, 삼손은 나실인의 '거룩한 계보'를 여인 때문에 더럽힌다.

성도들은 이러한 사사기를 읽으면서, 갖가지 기적을 체험하고 가나안에 '입성'한 이스라엘 민족이 너무도 쉽게 그 은혜를 '배신'한 채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에 분노한다. 마치 오늘날의 세상에 절망하듯,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사사기를 읽으며 마음에 채워야 하는 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인간의 한계와 죄의 무서움을 깨닫고 더 깊은 신앙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사기의 중요한 전제는 '선택과 자유'이지만, 이스라엘 민족의 삶은 그들의 잘잘못이 아닌 그들을 붙들고 계시는 더 큰 하나님의 일하심에 의해 정해진다는 것.

하나님이 개입하시지 않으면 인간이 겪을 참상이 이러하니 우리를 이 자리(콘텍스트)로 보내신 하나님께 우리가 이 삶의 자리에서 도망치지 않도록 은혜를 간구하는 마음을 가져야지, 그들을 비난하는 것으로 자기 책임을 떠다밀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사사기는 '우리와 우리 자손들을 위해' 남겨두신 기록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일하심'의 신비를 알게 해 주는 콘텍스트(context)로서의 '시간과 현실'이라는 관점에서 성경을 되짚어가고 있는 저자는, 사사기와 같거나 더 악독한 콘텍스트 가운데서도 여전히 일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것을 권면한다. 설교마다 각기 다른 바울서신들을 제시하면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우리가 겁내고 도망가는 동안 하나님은 기다리고만 계시지 않습니다. 그때도 하나님이 여전히 일하고 계시는 시간입니다. 이것을 사사기가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방법으로 일하실까요? 콘텍스트가 없으면 텍스트가 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이런 정황, 이런 콘텍스트 때문에 제한받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에게 시간과 정황을 주신 것은 우리가 간 길, 우리가 한 일, 우리가 가진 생각, 우리가 내린 결정이 무엇인지 우리로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박영선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저자는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나'라는 각각의 존재가 전후 문맥에 있는 인류라는 이름의 가치와 운명을 나누는 것"이라고 답한다. 쉽게 말해 '나는 인류 속에 있고, 그 한 부분을 책임지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성경이 그러하겠지만, 저자는 사사기에서도 '하나님의 일하심'과 '우리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그를 통해 나 자신의 삶에 '텍스트(text)'를 담아내라고 말한다. 인간의 삶에 어떠한 내용(text)을 채워야 하는가는 기독교만이 답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을 비난하고 분노하는 데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말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처럼 '사랑과 믿음'이라는 보다 적극적인 자리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윤리나 도덕은 우리의 진정한 텍스트가 될 수 없다. 우리는 부활과 생명과 용서와 사랑을 갖고 있는 자들이다.

"어떤 인생도, 어떤 경우도 하나님의 은혜가 품지 못할 자리는 없다"는 사사기 말씀 속에 담긴 은혜를 따라,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며 '대의, 이념, 이상' 같은 추상적 관념 대신 자기 자리에서 구체적인 삶을 살며 뚜벅뚜벅 걸어가야 함을 저자는 역설하고 있다.

이는 지난 14일 은퇴 기념 논문집에서 "나의 목회는 현실에 관한 것이었다. 교인들에게 이상을 심어 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일하심과 각자의 선택, 책임이 들어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가르치려 했다"는 저자의 고백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이런 역사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를 담으십니다. 우리가 선택한 죄의 자리, 죄로 말미암아 마땅히 받아야 할 징벌과 심판이라는 자리까지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 자리까지 찾아가 일하셔서 오직 하나님 당신에게서만 생명과 승리, 참된 영광이 나온다는 사실을 증거하십니다. 예수로 증거하시는 것이 그것입니다. 왕이 없어서 실패하든, 왕이 있어도 실패하든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예수의 오심으로 증거하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