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LA기윤실) 동족사랑나눔운동 본부장 유용석 장로가 이른바 18번으로 평생 애창한 노래는 ‘눈물 젖은 두만강’이다. 충남 당진 태생인 그는 먼저 간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찾아 세 살 때 어머니 등에 업혀 만주 북간도로 가면서 ‘푸른 물이 출렁이는 두만강’을 건넜다. 해방 이듬해의 귀국도 그 물길을 통해서였다. 그후 20대 중반까지 약 5년간 평양과 진남포에서 살다 1.4후퇴 때 배를 타고 월남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 미주창립에 산파역
20회 이상 방북 굶주린 어린이들 위해
사랑의 빵·기적의 젖염소 사업 등 전개
90세 노구 이끌고 오늘도 섬김에 앞장

9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섬김의 일선에서 동족 돕기 사역을 계속하고 있는 유용석 장로
(Photo : 기독일보) 9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섬김의 일선에서 동족 돕기 사역을 계속하고 있는 유용석 장로

교사, 무역회사 중역 등으로 일한 그는 1976년 미국에 이민 와 1993년 교회 개혁, 생활신앙 운동, 사회봉사 장려, 동족 돕기 등에 앞장서는 LA기윤실의 출범에 산파역할을 했다. 이 단체의 실무책임자를 맡아 겨레의 남루한 아픔에 동참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다. 1925년생으로 올해 나이 90세. 얼마 전 실무책임자 자리는 내려놓았으나, 여전히 동족사랑나눔운동 본부장으로서 초심을 간직한 채 섬김의 일선에서 마지막 생명의 불꽃을 태우고 있다.

그는 1997년 이래 20여 차례나 두만강을 건너 북한을 오갔다. 지난해 9월에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기윤실이 직접 운영하는 라선시(라진 선봉)의 빵공장을 방문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그때도 ‘다리 아래로 민족의 애환의 역사를 담은 두만강이 흙탕물로 흐르고 있었다’.

유 장로는 본보 인터뷰에서 “기윤실이 고통 당하는 동족을 외면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나부터 사랑으로, 나부터 바르게’가 우리의 모토니까”라고 말했다.

연 15~20만 달러 규모인 기윤실 예산의 80% 이상은 북한 주민, 중국의 조선족, 러시아의 고려인 등을 위해 쓰인다. 그중 가장 중요한 사업이 ‘사랑의 빵 나누기 운동’이다. 1996년 중국 연길시에서 빵을 만들어 북한으로 갖다 주는 것으로 시작된 이 일은 1997년 회령에 빵 공장을 설립, 운영하는 것으로 발전했고 그후 무산을 거쳐 라선시로 시설을 옮겨 계속되고 있다.

LA기윤실이 북한 라선시에서 직접 운영하는 빵공장의 모습
LA기윤실이 북한 라선시에서 직접 운영하는 빵공장의 모습

“아담하고 청결한 우리 빵공장에서 잘 훈련된 여직원들이 새로 보낸 제빵기계로 맛있는 빵을 만듭니다. 빵은 인근 농촌지역의 유치원과 탁아소에 배달되어 아이들의 양식이 되고요. 모든 과정을 미국에서 파견된 우리 책임자가 지휘 감독하고 있습니다.”

한 달에 생산하는 빵은 5만 개 정도로 약 1,500명의 어린이들의 발육에 필요한 영양을 공급한다. 기윤실은 의료기기와 약품을 구입해 병원에 전달하기도 한다.

“개인 및 교회들의 정성어린 후원금으로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들보다는 개인들이 훨씬 많은데 대개 ‘동족방문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저와 같이 중국과 북한을 다녀온 사람들입니다. 그분들은 현지의 어려운 형편을 직접 보았기 때문에 오랫동안 동참합니다.”

LA기윤실의 빵을 통해 발육에 필요한 영양을 공급받는 북한 유치원 어린이들
LA기윤실의 빵을 통해 발육에 필요한 영양을 공급받는 북한 유치원 어린이들

유 장로에 따르면 북한이 어려울 때 민간 차원에서 어린이들을 도운 것은 한국과 미국을 통틀어 기윤실이 처음이었다.

기윤실은 1997년부터 약 9년간은 하루 2~3Kg의 젖을 생산하는 ‘기적의 젖염소 보내기 운동’을 펼쳤다. 일반 염소보다 10배가 비싼 2,000여 마리의 젖염소가 평양 인근과 회령, 종성, 라선을 비롯한 북한 전역에 보급돼 식량난 해결에 기여했다.

“다들 북한의 동족을 돕는다고 나서지만 대부분 몇 년 하다가 그만 두지요. 우리처럼 지속적으로 하는 데는 거의 없습니다. 북한 당국도 기윤실이라면 믿어줍니다. 동족 방문을 간 미주 한인들에게 장마당 구경까지 허용하고요. 그런 게 없다면 어떻게 거의 20년간 사업을 해올 수 있겠습니까.”

기윤실은 중국 연길 ‘작은 천사의 집’을 통해 탈북 소년소녀들의 육체적, 영적 필요를 채워주고 미국 내 탈북자들에게 도움을 손길을 내미는 사업도 수년 동안 펼쳤다.

또 부모들이 한국으로 돈 벌러 가는 바람에 탈선하기 쉬운 중국의 조선족 학생들과 조선족 목회를 지원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매년 2만5,000여 달러를 보내고 있다. 태환장학회를 통해 벌이는 이 사업은 자긍심을 갖고 공부에 힘써 북경대를 가는 장학생들도 나오는 소담한 열매가 맺히고 있다.

이밖에도 카직스탄과 러시아 연해주의 고려인 돕기까지 할 정도로 동족사랑 활동의 스펙트럼이 넓다.

한 때 교회와 개인을 포함 600~700곳에 달하던 기윤실의 후원자는 현재 160~170곳 정도로 많이 줄었다. 그 이유를 묻자 “우리 민족이 꾸준함이 좀 부족하잖아요”라는 간단한 답이 돌아왔다. 그는 연말이면 후원자들에게 연하장을 겸한 감사편지를 요즘 받아보기 힘든 손글씨로 쓴다. 그동안 보낸 편지만도 2~3만통에 달한다. 이같이 인간적인 교류를 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딸’ 예닐곱을 얻기도 했다.

한 평생 주변에 올곧은 모습을 보여주며 섬김과 나눔의 본보기로 살아온 유용석 장로. 검박과 겸손은 그의 지병인 듯 했다. 기자를 만나던 날도 그는 정말 오래되어 보이는 양복바지를 입고 나왔다. LA기윤실 관계자가 일전에 한 언론의 ‘칭찬합시다’ 코너에 그의 이야기를 보냈다가 나무람을 듣기도 했다. 그 관계자는 이렇게 썼다. “늘 주변의 어려운 이들을 챙기고 돌보시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옷 하나도 허투루 사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늘 단벌 신사이십니다. 한번은 지인들이 유 장로님의 지나온 삶을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양복을 선물하려 했습니다. 계속 마다하시더니 결국 조건을 달아 받아들이셨습니다. ‘이 옷은 내가 입기에는 과분하기에 사양하고 싶지만 여러분의 마음이 담긴 것이니, 이 세상 떠날 때 마지막 가는 길에 입혀 달라.’ 그 양복은 아직도 장로님의 옷장에 걸려 있습니다.”

그는 몇 번이고 이번 인터뷰를 고사했다. 잔잔한 그의 미소가 긴 여운을 남기는 인터뷰를 마친 후에도 “내 스토리보다 기윤실 사역 위주로 써 달라” “늙은이가 노망 났다는 말을 들을까봐 두렵다” “기사가 나가지 않으면 안 되겠느냐”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그는 칭찬과 상급은 오직 천국에서 하나님께 받을 요량인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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