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는 아프다...
단지 '메가처치'에 대한 문제 뿐만이 아니다. 지금의 한국교회는 아프다. 복음의 시작점에서 '생존'의 몸부림이 '성장'이라는 욕망을 뒤집어 썼던 그 때부터, 한국교회는 아팠었다.
그러나 거의 모든 교회가 안정과 성장이라는 '도핑(doping)'을 계속 투여하고 있을 뿐이었다.
산업화의 촉발, 도시화에 대한 대안 없던 행정, 작은 지역 안에서 어지럽게 발전된 운송망, 그리고 최첨단 정보통신의 발달은 교회의 대형화를 위한 좋은 토양이 되었다.
이와 함께 유교적인 환경에서 비롯된 '가족주의'는 타인에 대한 '배타성'의 내면을 키우고, 이는 '경쟁'이라는 외면으로 드러났다. 브레이크 없는 '인간의 탐욕'과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지배, 정치적 이슈와 친(親)정부적 교회들....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메가처치'의 등장은 이미 예견된 수순이 아니었을까.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다.
메가처치의 등장은 한국교회가 아프다는 증거였다. 단지 아프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메가처치와 메가처치 현상
병이 들었다면 병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그것을 제거해야, 우리는 건강해지는 것이다. 우리는 이 단순한 논리 아래 메가처치와 메가처치 현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메가처치의 등장은 여러 현상을 낳았다. 물론 메가처치들만의 문제도 아니다. 교회의 '크기'와는 상관없이, 교회 안에서 그 욕망의 똬리를 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단지 메가처치에 대한 외형적 논의를 넘어서서, 우리 내면의 큼큼한 속내를 들추어 낸다.
메가처치 현상은 사회병리적인 문제들과 함께하고 있다. 저자가 지적하듯 '크기'의 문제라기보다, 근원적으로 '현상'과 '경향'의 문제에서 시작해야 한다. 책은 사회학적인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교회 안에 발생한 여러 현상들에 대한 근원적 문제를 폭넓게 다룬다. 그리고 그는 결론을 내린다.
"요약하면 첫째, 메가처치 현상은 지역교회가 이웃 교회와의 연합에 실패한 교회적 현상이다. 둘째, 메가처치 현상은 지역교회 내의 모든 신자가 한 공동체를 이루는 데 실패한 교회적 현상이다. 교회론으로 설명하면 메가처치 현상은 첫째로 교회가 공교회성을 상실함으로써, 둘째로 교회가 공동체성을 상실함으로써 나타났다고 말할 수 있다."
저자는 '공교회성'과 '공동체성'을 상실한 교회가 사회의 여러 병리적 현상에 영향을 받아, 축적된 내부의 성장동력이 외부의 제재 없이 표출된 것이 곧 메가처치가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메가처치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메가처치를 지향하려는 그 현상적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곧 공교회성의 확보와 공동체성의 건강함을 대안으로 삼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메가처치에 대한 문제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교회 전반에 흐르는 '성장제일주의 교회', 즉 저자가 말하는 '욕망 교회'에 대한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 '거룩한 공교회성의 회복'을 통한 '우주적 교회'를 새롭게 인식하는 것과, 공동체의 관계성을 회복하는 의미에서의 '아나뱁티스트' 사례를 언급하여, 그들의 공동체 인식에 대한 부분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실제 현상을 학문적 언어 안에 가두다
시작은 한국교회의 실천과 현실, 그리고 그 안에 담겨 있는 욕망을 꼬집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문제에 대한 '대안적 교회론'이라는 것이 학문적 분야에 갇힌 답답함도 지울 수 없다.
디트리히 본회퍼의 '관계적 교회론'을 끄집어내고, 한국교회 안에 있는 개인주의와 개교회 중심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진행했지만, 아쉽게도 그 대안은 이미 예상대로 진행되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제시한 답변으로 마무리되고 말았던 것이다.
'공교회성 회복'을 제시한 것이 교회의 속성 가운데 주어진 '보편적 교회'를 의미하는지. 아니면 '제도적 교회'의 한계성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혼란도 있다. 전자에 대한 질책이라면 개인주의과 개교회 중심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이것이 제시되는 듯 보이지만, 가끔씩 등장하는 '제도적 교회'에 대한 지적이라면 '제도 개선'을 더욱 강화해야 하며, 제도에 대한 비판과 대안이 등장해야 했다. 예를 들어 메가처치의 반향으로 생겨난 '건강한 작은교회들'의 생태계에 대한 구체적 대안이 쏟아져 나왔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 '공동체성'은 '관계'를 통해 형성되고 확장된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교회 공동체 안에서 '관계'의 흐름과 그 안에서의 '공감'과 '소통'이라는 주제가 더욱 밀도 있게 제시되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공동체성'의 중요함과 '개인의 자유'를 모두 강조하려다 보니, 결론은 '성령께 의존'이라는 또 다른 명제로 들어가고 말았다.
사실 이런 답변은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해답'이지만, 누구도 명쾌하게 '답'을 보여줄 수 없는 '답'이다. 저자는 '열린 마음과 자유로운 토론을 통해 공동체가 성경의 바른 해석'을 가질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또한 현장에서 완벽하게 실천할 수 있는 답은 아니다.
그러다 보니 실천적 지침과 대안의 이야기라기보다는 갑자기 '내면적'이고 '통상적'인 주제로 급전환되면서, 필자는 '학문적 언어'가 갖는 일종의 거리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대안은 다소 '고루한 답변'으로 마무리되고 말았다는 생각이다.
'메가처치'를 넘어서, 그리고 '불안정한 교회의 현실'을 넘어서
사실 지금 상황이라면 메가처치의 유지와 확산은 한국 사회에서 그 전망이 불투명하다. 곧 불어닥칠 '금융위기'와 급속도로 진행되는 '교회 일탈' 현상, '고령화 사회'에서 '초고령화 사회'로의 전환과 사회적 불안은, 단순한 메가처치 현상 가운데 있는 교회들만의 위기가 아니다. 모든 교회가 가진 전반적인 위기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문제는 단순히 '메가처치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불투명한 '교회의 미래'를 함께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금 더 현장성 있는 실제적인 대안과, 그에 대한 계속되는 실험, 그리고 대안적 모델의 등장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게 역사적 전통과 오늘의 문화와의 대화를 시도하며 과감히 변혁할 수 있는 '용기 있는 교회' 공동체의 모습이 요구된다.
/이헌주 목사(고양 너머서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