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아닉 유대인으로 잘 알려져 있는 아셔 인트레이터 목사님은 최근 보내신 컬럼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됨, 리더십, 성령의 기름부음 간에는 긴밀한 상관 관계가 있다. 사도행전 1장, 예수아의 제자들이 사도들의 리더십 아래서 한 마음으로 기도에 힘썼을 때 사도행전 2장 오순절 성령의 불이 임하였다.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가 올려지기 위하여는, 물론 제자들과 하나님 사이의 순결한 수직적 관계도 중요하지만 서로 간의 언약 관계, 즉 수평적 하나됨에 대한 매우 특별한 헌신이 있어야 한다,... 시 133편 말씀처럼 성령의 기름부음은 오직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부어지기 시작하여 전 공동체로 흘러간다. 이 곳 시온에서 리더들의 하나됨이 회복된다면 굉장한 부흥과 부활의 생명이 온 세상으로 흘러가게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진정 기독교인들이, 특히 리더십들이 주의 이름으로 하나될 수 있다면 우리가 그토록 기대하는 성령의 부흥이 강력한 수준으로 임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우리로 하나되게 하는 요소는 서로를 하나님의 마음으로 불쌍히 여기는 사랑일 것입니다. 얼마 전부터 사랑에 대하여 묵상하는 가운데 특히 '사랑은 온유하며' 라는 말씀이 제 마음을 끕니다.
성경에는 '온유'라는 단어가 3가지 다른 상황에서 사용됩니다. 먼저 예수님의 산상수훈 가운데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온유는 가난한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즉 자기의 죄를 보며 내 안에 의가 없음을 깨닫고 마음이 가난해지고, 그리하여 애통하며 회개할 수 있는 자만이 온유해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런 자들은 남들이 자신에 대하여 무엇이라 말하던 민감하지 않습니다. 내가 온유한가 알고 싶습니까? 나를 비난하고 대적하는 자들에게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사무엘 하 16장에는 시므이란 인물이 압살롬의 반란을 피해 궁을 떠나는 다윗을 향하여 가장 악하게 저주하는 장면이 기록됩니다.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이므로 화를 자초하였노라." 삼하 16:7-8. 다윗은 그 악한 말들을 들으며 얼마나 가슴이 아프고 분노했을까요? 그러나 이어지는 다윗의 반응은 그가 얼마나 온유한 자인가를 보여줍니다. 시므이를 당장 처형하자고 제의하는 신하들에게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저주가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니 그대로 두라. ...혹시 하나님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갚아주시리라." 삼하 16:10-12. 결국 후에 시므이는 다윗에게 나아와 용서를 구합니다. 이처럼 온유는 화합을 불러옵니다.
이 외에도 딛 3:2 에서 온유는 겸손과 동의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온유는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자만이 가능한 덕목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세례요한은 사람들이 그가 도대체 누구인가 궁금해 했을 때, 자신은 그저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에 불과하다고 대답합니다. 소리는 볼 수 없고 오직 듣기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여 당신들은 나를 주목한다거나 나를 바라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사람들이 그저 자기는 잊어주고 자기가 증거하는 그 분만을 바라보고 주목하기만을 원했습니다. 이처럼 참된 겸손이란 자기를 잊어버리고 모든 초점을 예수님께만 맞추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를 잊어버리고 오직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에 집중할 때 온유할 수 있습니다. 저는 특히 인간 관계로 인하여 마음이 상했을 때 주님 죽으신 십자가를 묵상합니다. 그러면 주님의 사랑 가운데 상한 마음에 점점 위로와 평안이 밀려옴을 느끼게 됩니다. 한편 마 11:28,29 에서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하셨는데, 여기서 온유는 힘의 절제를 의미합니다. 온유의 영을 가진 자들은 어떤 흥분할만한 상황에서도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며 말을 다스릴 수 있는 가장 강한 자들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절제하여 마음을 낮추며 나의 죄인됨을 깨닫고 주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온유하고 겸손하여 공동체의 하나됨을 불러오게 될 것입니다. 이같은 공동체에 하나님은 반드시 크신 은혜를 부어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