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저우 13행의 6개월 비자정책과 마카오
대외 무역거래에서 지역에 대한 규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거주 기간에 대한 제한, 즉 외국인 비자정책이 있었다. 청나라는 일구통상 정책 직후인 1759년 방범외이규조(防范外夷规条)를 공표했다. 외국인들을 관리하기 위한 법이었다. 이 법에 의하면 외국인들은 광저우 13행에서만 머물러야 했고, 5-10월에만 대외무역을 허용했다. 겨울에는 방위상 이유로 외국인들은 중국 본토에 머물 수 없었다. 즉 6개월 거주 비자인 셈이었다. 그래서 13행에서 일하던 외국 상인들은 겨울이 오기 전 광저우 인근 마카오로 돌아갔다. 마카오는 광저우에서 300리 떨어진 섬으로, 16세기 포르투갈이 지배하고 있어 중국 본토에 비해 자유로웠다.
또 서양 여자나 가족을 동반하고 광저우로 들어올 수도 없었다. 그래서 외국 상인이나 선교사들은 가족을 마카오에 남겨둔 채, 1년의 반인 봄·여름은 광저우 13행에서, 가을과 겨울은 마카오에서 생활했다. 13행에는 혼자 온 외국 남자들만 있었다.
모리슨 선교사도 이런 제한 규정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1809년 결혼해서 가족은 마카오에 살았고, 1년의 반은 떨어져 지내야 했다. 중국에 머물기 위한 방편으로 마카오에 반 년을 지내야 되는 상황이었다. 모리슨 선교사는 생전 첫째 아들과 부인을 잃었고, 그들은 마카오에 묻혔다. 그도 광저우 13행에서 순교했으나, 아들이 유해를 마카오로 모셔가 묘지에 묻으면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이 조례 덕분에 마카오는 큰 혜택을 봤다. 원래 마카오는 포르투갈이 지배했던 도시로 16세기 번성했지만, 해상 주도권을 스페인에게 빼앗긴 후 쇠락을 거듭했다. 그러나 18세기 광저우의 거주제한 정책으로, 부유한 상인 가족들이 마카오로 몰려들어 번성했다. 13행은 남자 상인들만 거주하는 곳인 반면, 마카오는 부유한 상인 부인과 가족이 소비하면서 생활하는 곳이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이 오늘의 마카오를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광저우 입국 당시, 고립무원 상황이던 모리슨 선교사
외국인에 대한 공간적·시간적 제한 말고도 모리슨 선교사에게는 힘든 제약이 또 있었다. 1724년, 강희제는 서양인의 중국 선교를 전면 금지했다. 청나라가 로마가톨릭과 이른바 예의논쟁을 벌이면서 생긴 조치였지만, 개신교 선교도 금지됐다. 상인들은 그나마 제한된 조건 하에 광저우로 들어오는 것이 허용됐지만, 선교사의 입국은 서양 상인들조차 부담스러워했다. 모리슨 선교사는 영국 런던에서 광저우로 오는 동인도회사의 선박을 탈 수 없었다. 선교사를 태워 광저우에 입국시켰다는 사실이 청나라 정부에 알려질 경우 사업상 불이익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장로회의 협조로 상선(Trident호)을 탈 수 있었고, 광저우에 들어갈 수 있는 추천서도 받았다. 이 추천서를 들고 모리슨 선교사는 1807년 마침내 광저우 황포항에 도착했다.
황포항은 광저우 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부두로, 지금은 황포고항(黄埔古巷)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태평양을 건너온 큰 범선들이 정박해 있던 19세기의 황포항 모습과는 대조를 이룰 정도로, 지금은 아담하기 그지 없다. 몇 척의 나룻배와 수양버들, 그리고 강 기슭을 철썩거리는 강물이 우리를 반겨준다. 나지막한 야산에는 당시 등대 역할을 했던 파주탑이 서 있어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주고 있다. 부두 앞에는 세관 신고를 하던 월해관 건물이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되어 있다. 건물 내부를 기념관으로 만들어 호화롭던 옛 영광을 소개하고 있었다.
황포항은 근대 뿐 아니라 광저우의 2천 년 역사상 열려 있던 부두라서, 이야기가 많은 곳이다. 그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자료와 함께 월해관 기념관에 잘 전시돼 있었다. 모리슨 선교사의 이야기도 한 벽면을 차지하고 있다. 황포고항의 명물인 나룻배 죽을 먹으며 강변을 바라보았다.
모리슨 선교사가 배에서 내렸던 곳이 어디쯤일까. 황포항을 거쳐 모리슨 선교사는 미국 상인들과 작은 배를 타고 서쪽에 있는 13행 미국 상관에 도착했다. 우리나라에 온 선교사들이 제물포항을 거쳐 한성으로 들어갔듯.
광저우로 들어온 것은 성공했으나, 상관 내에서 성경 번역을 공공연하게 하기는 힘들었다. 선교사 신분은 같은 영국 상인들마저 외면하게 했고, 중국 정부의 감시도 힘들었다. 화려한 생활을 하는 부유한 상인들 사이에서 살기도 어려웠다. 책을 구입하면서 생활하기에, 영국 선교회에서 보낸 200파운드는 턱없이 모자랐다. 그래서 주거지를 13행 화물창고로 옮기고 중국인처럼 생활했다. 그는 중국식 굽 높은 신발과 긴 옷을 입고 변발을 한 채, 싸구려 중국 음식을 젓가락으로 먹었다. 모리슨 선교사는 철저히 혼자였다.
겨울이 돌아와 마카오로 가야 했지만 개신교 선교사 입장에서는 그곳 사정도 우호적이지 않았다. 당시 마카오는 천주교를 믿는 포르투갈이 점령하여 관리하고 있었고, 개신교 선교 행위는 일체 금지됐다. 모리슨 선교사는 영국에 8개월간 200여 통의 편지를 보냈으나, 겨우 2통의 답장을 받았을 뿐이었다. 그만큼 런던선교회의 기대와 관심도 높지 않았다. 어렵게 광저우에 도착했지만, 모리슨 선교사는 아무도 의지할 수 없는 고립무원의 상황에 놓였다.
모리슨 선교사는 우선 천주교 신자였던 두 명의 중국인들로부터 비밀리에 목숨을 걸고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중국인들에게 중국어를 배우는 것도 금지됐기 때문이다. 외국인에게 중국어를 가르치는 사실이 관청에 알려지면 극형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중국인 선생은 독약을 휴대하고 다녔다. 독약 먹고 죽는 것이 극형보다 나았던 것이다.
모리슨은 영국에서 중국어 공부를 했지만, 아직 능숙하게 구사할 정도는 아니었다. 모리슨 선교사는 영국에서 라틴어·히브리어 등 다양한 언어를 공부했지만,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문자가 중국어라고 생각했다. 모리슨 선교사의 요청으로 1813년에 중국에 오게 된 밀네(W. Milne) 목사의 표현을 빌리면 "서양인이 중국어를 배우려면 몸은 구리, 심장은 철, 머리는 단단한 나무, 손은 강철로 만들어야 하고, 독수리의 눈과 사도 바울의 마음, 그리고 므두셀라의 장수를 지녀야 한다"고 할 정도였다.
광저우 13행과 마카오를 오가며 성경 번역과 중영 사전을 준비하던 모리슨 선교사에게, 1809년 큰 변화가 찾아왔다. 메리 모튼과 결혼하고, 다음날 영국 동인도 회사의 통역사로 취직이 된 것이다. 결혼은 그에게 안정감을 줬고, 취업을 통해 생활 뿐 아니라 광저우 13행 체류 문제도 해결된다. 그는 동인도 회사가 1834년 해산될 때까지 25년간 근무했다. 선교와 통역 업무가 모순되는 측면도 있어 런던선교회의 오해를 받기도 했으나, 신분 보장의 중요성을 들어 본국에 양해를 구했다.
광저우행 승선조차 거부했던 모국의 동인도회사가 그에게 주목했던 건 중영 사전 편찬의 실용성 때문이었다. 동인도회사는 사전 발행을 위해 모리슨에게 12,000파운드를 지원했고, 마카오에 인쇄소를 설립하는 것도 도왔다. 7년간의 노력 끝에, 그는 1815년 중영사전 제1권을 출간하고 1823년 3부 6책 4,595쪽의 중영 사전을 완료했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중영사전이었다. 제1부는 부수, 제2부는 소리, 제3부는 영문 자모로 배열한 중영사전이었다. 중국어 문법과 관련된 소책자도 출판했다. 학자들은 이 사전을 "서양인이 중국 사회와 제도를 알게 된 열쇠" 또는 "중국 자료 정보의 창고"로 평가했다. 왜냐하면 이는 단순한 언어 사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중국에 관한 역사, 문화, 정치, 법률, 풍속 등을 총망라한 일종의 백과사전이었다. 모리슨 선교사는 이 일로 1824년 영국황실학회 회원으로 피선되는 영예를 얻는다. 중영 사전 출간은 일영 사전 출간에도 영향을 주었다. 모리슨 선교사로 인해 동서간 지식과 정보가 소통될 수 있는 플랫폼이 만들어진 것이다.
1810년 모리슨 선교사는 13행에 있는 중국인 거리의 인쇄소를 찾았다. 거기서 몇 명의 중국인들을 만났다. 그들은 훗날 최초의 세례자가 된 채고, 그리고 최초의 목사가 된 양발이었다. 이들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소개하겠다.
13행이 맺어준 중국어 성경의 인연
모리슨 선교사는 중국에 온지 3년 만인 1810년 사도행전을 번역했고, 1813년에는 신약성경을 완역했다. 12년 3개월 만인 1819년에는 신·구약을 완역해, 1823년 신천성서(神天圣书)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구약 번역의 일부는 1813년부터 중국 선교에 동참한 밀네 목사가 도왔다. 구약은 밀네가 번역하고 모리슨이 감수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번역 문체는 삼국지 문체를 적용했다. 문어체는 관료나 상류층이 좋아하는 문체로서 서민들이 이해하기 어렵고, 서민체인 백화체를 채택하면 고위층이 홀대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성경 말씀이 완전하게 중국인에게 알려지는, 중국 기독교 역사의 이정표가 만들어졌다.
모리슨 선교사는 인쇄물을 통한 복음 전파야말로 대외적으로 봉쇄하고 있는 중국을 돌파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라 여겼고, 성경을 인쇄해 계속 배포하면 입으로 직접 전할 수 없는 복음이 전파될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아편전쟁 후 중국에 들어온 수많은 선교사들이 이 성경을 가지고 중국 선교를 했다.
모리슨 선교사는 중국에 온지 6년 만에 신약을 전부 번역할 수 있었다. 이렇게 빨리 성경이 번역된 것에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었다. 18세기 말 영국 모슬리(William W. Moseley) 목사는 대영박물관의 먼지 속에서 중국어로 된 성경 원고를 발견했다. 제목은 중문 4복음(Quartuor Evangelia Sinica)이었다. 그는 흥분하여 '중국어 성경 번역 및 출간의 중요성'이라는 호소문 100부를 인쇄해 영국 모든 교회와 선교단체에 보냈다. 그러나 대부분 냉담한 반응을 보였고, 모리슨이 입학했던 신학대(Hoxton Academy)의 보그(Bogue) 학장만 편지를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그는 이 사역을 담당할 사람을 찾았고, 모리슨에게 기회가 왔다. 라틴어와 중국어로 쓰여 박물관에 잠자고 있던 성경 원고는, 마침내 오래된 먼지를 털고 모리슨에게 전달됐다.
이 원고는 1700년 로마가톨릭 선교사인 바체트가 번역한, 이른바 바체트(J. Basset) 역본으로 추정된다. 1737년 광저우 동인도회사에 근무했던 호지슨(Hodgson)이라는 사람이 우연히 이것을 보고 영국에 돌아올 때 필사해 왔다. 그리고 왕실학회 슬로안(Hans Sloane) 회장에게 기증했다. 그는 다시 이것을 대영박물관에 기증했던 것이다. 이것이 마침내 중국 선교에 관심이 많던 모슬리 목사에게 발견됐고, 모리슨에게 전달됐던 것이다. 모리슨 선교사는 중국어 선생이었던 광저우 출신 화교 양삼달과 함께 영국에서 이 원고를 교재 삼아 공부했다. 그리고 양삼달의 도움을 받아 다시 필사해서 중국에 오는 짐 속에 가져왔다. 13행에서 돌아다니던 라틴어 중국어 성경 필사본이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로버트 모리슨을 13행으로 오게 했고, 마침내 중국어 성경의 완성을 보게 한 것이다.
로버트 모리슨이 주로 활동했던 광저우 13행 건물은 안타깝게도 남아 있지 않다. 천 년을 갈 것 같았던 13행이었지만, 주강 속 한 줌의 재로 한순간 사라졌다. 1854년 2차 아편전쟁이 광저우에서 다시 발발하자, 성난 군중들은 서양인들이 모여 있는 13행에 불을 질렀다. 동서의 문명이 만나 숱한 역사를 만들어낸 거대하고 활기찬 13행의 모습은, 그래서 당시 그림을 통해서만 느낄 수 있다. 광저우 서관에 가면 13행 역사관이 있어 13행의 여러 모습들을 관람할 수 있다.
작은 흔적들이라도 더듬으려 13행이 있었던 광저우 서쪽 구시가지 쪽으로 갔다. 실제 13행 상관 건물은 사라졌지만, 지명은 아직 남아 있었다. 강변도로를 따라 서쪽을 향해 차를 타고 달리면, 인민대교가 시작되는 곳에 이른다. 연강서로(沿江西路)라는 강변길이 있고 옛 월해관 건물과 우정박물관 등 예사롭지 않은 웅장한 건축물들이 거리를 지키고 있다. 이 일대가 모두 13행 지역이었다. 강변 쪽 외국 상관들은 다 타 버리고, 뒤편 작은 건물들만 남아 있었다.
이미 구시가지가 된 13행 부근은 광저우인들과 동고동락해 온 토속적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부근은 오래 전부터 상권이 발달한 곳이라 각종 도매시장이 몰려있어 짐 꾸러미와 사람들이 엉켜 복잡했다. 길 또한 좁아서 차까지 밀려 돌아 나오기가 쉽지 않았다. 건물들은 낡았고 기루(骑楼)라는 중국·서양을 결합한 스타일의 건물이 꾸불거리는 길을 따라 이어져 있었다. 기루는 주랑 구조의 13행 외국 상관 건물이 발전하며 생겨난 광저우 특유의 건축 양식이다. 여러 개의 기둥을 나란히 세운 복도 같은 기루를 따라가면, 모리슨 선교사와 양발이 만났던 인쇄소가 나타날 것 같았다. 13행에서 강변 둑길을 걸어가면 장제라는 곳이 나타난다. 1904년 장제에 광저우 기독교 청년회가 설립되었다. 이 건물에 로버트모리슨기념당이라는 예배당이 있었다. 그러나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철거되고 옛터만 남아있다.
현재 광저우에는 모리슨을 기념할 가시적인 유적지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필자는 그가 중국어 성경 번역을 꿈꾸게 한 13행, 실질적으로 성경 번역을 시작했던 13행, 1834년 마지막 숨을 거둔 광저우 13행 거리에서 '최초'라는 말을 기억하고 싶다. 최초라는 것은 두렵고, 어렵고, 외롭지만, 그 자체가 역사가 되며, 뿌리부터 바꾸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김현숙 집사
2003-2013년 광저우 거주
2011년 광동 선교 이야기 <시님의 빛> 출간
2011년부터 광저우 선교 유적지 홍보 및 안내
2013년 에세이문학 등단
(현)한국 수필문학진흥회 이사
(현)한중 우호교류협회 여성교육위원회 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