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이르는 병
쇠렌 키에르케고르 | 비전북 | 272쪽
키에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1813-1855)는 1813년 5월 5일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Copenhagen)에서 일곱 형제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1830년 코펜하겐 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마치고 아버지의 소원에 따라 신학을 선택했다. 그러나 신학보다는 철학, 문학, 역사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는 1848년 부활절에 그의 성격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종교적(신비적) 체험을 했다. 이 체험 후 쓴 종교적 작품이 바로 <죽음에 이르는 병(1849)>이다. 부제는 '교회의 깨달음을 위한 그리스도교적인 심리학적 탐구'이다. 책은 제1부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다'와 제2부 '절망은 죄이다'로 구성되어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 저서에 대해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는 평가를 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중요한 저서를 1848년 3월에서 5월까지 단 두 달 만에 저술했다. 이처럼 짧은 기간에 저술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천재성 덕분이기도 하지만, 장기간에 걸쳐 이 주제에 관해 사색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주제는 '절망이 가진 본성과 의미'이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을 저술하기 10년 전부터 그를 사로잡아 왔던 문제였다. 그는 "현대는 절망의 시대이다"고 쓰고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코펜하겐의 소크라테스였다. 그는 절망에 빠져 종교적으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의 고통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는 그들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을 가진 사상가였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이 무한한 것과 유한한 것의 종합이요,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의 종합이라고 말한다. '자유와 필연의 종합'인 인간의 과제는 자기가 되는 데 있다. 그런데 그것은 오직 신(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수행될 수 있다. 자기가 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된다는 것은 유한적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무한적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구체적으로 된다고 하는 것은 실로 하나의 종합이기 때문이다.
그는 절망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고 말한다. 첫번째는 자기 자신이기를 원하지 않는 것, 즉 자신을 제거하려는 데 있다. 그는 이것을 '연약함'이라고 부른다. 두번째는 절망적으로 자기 자신이기를 원하는 데 있다. 그는 이런 형태를 반항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반항의 형태는 연약함의 형태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으며, 따라서 연약함의 형태로 환원될 수 있다.
절망은 결국 사람의 연약함에서 기인한다. 연약함에 매여 있는 것이 바로 절망이다. 얽매임이 강할수록 절망도 깊어진다.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죄는 강화된 연약함 혹은 강화된 반항이며, 죄는 절망의 강화이다. 그러나 절망이 강화될수록, 즉 죄가 깊어질수록 역설적으로 구원의 가능성도 커진다. 왜냐하면 절망이 강화될수록 결단의 중요성에 대한 자기의 이해도가 깊어지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닥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불행은 그리스도로 인해 넘어져, 계속해서 넘어진 상태로 있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마 11:6)"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에 대해 어떤 의견도 갖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일종의 걸려 넘어짐이다.
가장 낮은 형태의 걸려 넘어짐은, 그리스도의 문제 전체를 해결하지 못하고 남겨두는 것인데,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나는 그것에 관해서는 아무런 결정도 하지 않을 작정이다. 나는 믿지 않지만, 아무 것도 결정하지 않겠다." 이것이 걸려 넘어짐의 형태라는 것을 대다수의 사람은 알지 못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해 중립적이라는 것이 걸려 넘어짐이라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선포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해 하나의 의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가 현존한다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가 현존했다는 것은 모든 실존과 관련된 결단이다. 만일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선포되었다면, "나는 그것에 대해 어떤 의견도 가지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걸려 넘어짐이 된다.
두번째 형태의 걸려 넘어짐은, 부정적이지만 수동적인 형태를 띤다. 이 형태의 걸려 넘어짐은 그리스도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느낀다. 그는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해결하지 못하고 달리 바쁜 인생을 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고 믿을 수도 없다. 이 형태의 걸려 넘어짐은 "그대는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물음이 실제로 모든 물음 중에서 가장 핵심적이라는 것을 알고 그리스도교에 경의를 표하지만, 넘어진 사람은 그림자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다. 자기 내면의 깊은 곳에서 그는 항상 이런 결정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의 삶은 황폐해질 수밖에 없다.
걸려 넘어짐의 마지막 형태는, 적극적 형태이다. 이 형태는 그리스도교를 비진리, 거짓이라고 선언한다. 이런 걸려 넘어짐은 그리스도교가 역설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따라서 죄와 죄의 용서 뿐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핵심 진리를 부정하게 된다.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이런 형태의 걸려 넘어짐은 성령을 거역하는 죄이고, 그리스도를 악마가 꾸며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따라서 이 형태의 걸려 넘어짐은 죄가 최고도로 강화된다.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믿음으로 예배를 드린다. 그러나 예배를 드리는 것은 믿음의 표현으로써, 예배를 받는 자와 드리는 자 사이에 무한한 질적 심연이 있다는 것을 확증한다.
<죽음에 이르는 병>은 키에르케고르의 저작들 중 그 의도와 서술이 가장 알기 쉽게 쓰였다. 그래서 가장 많이 읽히고 있으며, 대표작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또 인간의 심리를 깊이 통찰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높이 평가된다. 인간에 대한 그의 관찰은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 감명을 주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