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원자탄 산돌 손양원 목사가 자신의 두 아들을 죽였던 공산군 게릴라를 사형대에서 빼내어 양아들을 삼을 당시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면 1,2계명을 지키기 위해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옥에 갇힌 것도 헛일이 된다”고 말했다고 딸 손동희 권사가 간증했다.

손 권사는 8일 오전 강변교회에서 열린 한국복음주의협의회 월례발표회에 참석,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손 권사는 손 목사에 대해 “당시 그 살인범이 체포됐다는 말을 듣고는 양아들을 삼을 것을 결심하셨다”며 “극구 반대했음에도 성경말씀이라며 그 결정을 돌이키지 않으셨다”고 말했다.

손 권사는 손 목사가 6.25 당시 피난길에 오르는 친구들의 권유에도 “애양원의 나병환자들을 버릴 수 없다”며 순교를 자처했다고 전했다.

손 목사는 당시 “이 난국에 가장 급한 일이 무엇이겠는가. 양 먹이는 목자가 내 양떼 신앙을 지켜야지 더구나 몸도 성치 않는 나환자를 버리고 나 혼자 살자고 어디로 피난 가겠나.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9월 13일 공산당이 애양원에 들이 닥쳤고 강단 뒤에서 기도하고 있는 손 목사를 납치했다. 손 목사는 이후 15일간 여수 감옥에서 ‘미국 스파이’ ‘미국 앞잡이’ ‘공산당을 악선전했다’며 몰매를 맞고 9월 28일 공산군들이 후퇴하며 학살하는 현장에서 숨을 거뒀다.

손 권사는 “아버지와 두 오빠는 떠났지만 그들의 시체 안에는 한 알의 씨앗이 남아 있었다”며 “그 씨는 지금 싹이 나고 움이 터서 많은 열매가 맺혀 수 없이 많은 영혼들을 깨우치는 ‘믿음의 표본’으로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는 사실을 저는 뒤늦게나마 깨달았다”고 말했다.

이날 발표에는 주기철 목사의 아들 주광조 장로도 참석, 신사참배 거부로 갖은 고초를 겪으며 전했던 주 목사의 주옥같은 설교들을 전했다. 주 장로에 따르면 당시 주 목사는 교회들의 신사참배를 지적하며 ‘예언자의 권위’를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주 목사는 특히 1935년 5월 금강산 온정리 장로교 수양관에서 열린 전국 목회자 하계수양회에서 일본 경관에 제지를 당하면서까지 설교를 전했는데 당시 주 목사는 “생사여탈의 대권을 잡은 임금 앞에서 그 죄를 책망하는 세례 요한도 일사각오였고 나단이나 낙스도 일사각오였고, 루터도 물론 일사각오였다”며 “일사각오 연후에 예언하는 것이요, 일사각오 연후에 예언자의 권위가 서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주기철 목사는 “여러분, 몰라서 말 못하는가? 왜 벙어리 개가 되었는가? 오늘 목사도 일사각오를 한 후에 할 말을 하고, 목사의 권위, 예언자의 권위가 서는 것이다. 그런데 일개 경찰관 앞에서 쩔쩔매고서야 예언자의 권위, 목사의 권위가 어떻게 설 것이오? 일사각오”라고 말을 이었다. 주 목사의 설교는 이 부분을 전하며 일제 경관에 의해 제지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주 장로는 “평양 형무소의 묵중한 문이 닫히며 그 틈으로 뵌 푸른 죄수복에 짧은 머리, 그리고 깊게 패인 아버님의 두 눈은 어느 누구의 눈빛보다도 강렬했고, 아버님의 잔잔한 미소는 세상 어느 누구보다 자애로우셨다”며 “오랜 세월동안 아버님의 믿음과 선택, 그리고 순교를 다 이해할 수 없고 다 용납할 수도 없었지만, 그러나, 아버님의 믿음은 옳았다”고 강조했다.

이기풍 목사의 딸인 이사례 권사는 이 목사의 제주도 선교과정에서 있었던 각종 고초들을 전했다. 이 권사는 “아버지는 관용, 인내, 겸손을 최고의 신앙덕목으로 삼고 이를 삶으로 직접 실천해 보이셨다”며 “젊은 시절 몇 차례나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선교에 몸담으셨고, 말년에는 신사참배 거부로 옥고를 치러 병으로 소천하기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충성하셨다”고 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