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농부가 자기 발에 쳐 놓았던 새그물에 티티새 서너마리가 잡혀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신이 난 농부는 티티새들을 집으로 가지고 와서 아내에게 주면서 말했습니다. “숫티티새들을 잡아왔으니 저녁식사 때 맛있게 먹읍시다”

아내는 티티새를 요리하려고 가만히 살펴보다가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이 티티새들은 숫티티새가 아니라 암티티새에요” 당신 눈이 이상해졌군요. 농부는 얼굴을 찡그리며 아내의 말을 받아쳤습니다. “멍청한 마누라, 숫티티새와 암티티새도 하나 구별 못하나?”

그러자 아내도 화가 나서 쏴붙였습니다. “암티티새와 숫티티새도 구별 못하는 것을 보니까 당신도 이제는 늙은 것이 분명해요!”

자존심이 상한 농부가 몽둥이를 들고 말했습니다. “망할 놈의 할망구, 주둥이만 살아서. 그래 어디 늙은이에게 죽어봐라” 그리고는 아내를 두들겨 팼습니다.일 년 후, 두 부부의 관계가 회복될 무렵, 아내가 지난 이야기를 다시 꺼냈습니다. “벌써 일 년이 지났군요! 당신이 암티티새들을 잡아와서는 숫티티새라고 우기면서 나를 개 패듯이 때렸지요.”

농부가 얼굴을 붉히며 말을 했습니다. “아직도 그 무식한 것은 변함이 없군요!” 농부는 다시 분노가 솟구쳤습니다. “그래, 이번에는 내가 무엇이 옳은지 분명히 가르쳐주지!” 다시 몽둥이질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해마다 두 부부는 잊을만하면 “티티새 논쟁’을 벌이다가 남은 생애를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행복한 노년을 보낼 수 있었는데, 그 불필요한 티티새 논쟁을 벌이다가 결국 원수처럼 생을 마감한 것입니다.

암컷이든 수컷이든 가리지 말고 그냥 맛있게 먹으면 그뿐인 것을, 불필요한 논쟁을 벌이다가 삶의 가장 소중한 부분을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이 “티티새 신드롬”이 있습니다. 본질적인 것이 아닌데도 거기에 목숨을 걸고 싸움을 벌입니다. 자존심, 욕심 그리고 이해타산 때문에 우리는 너무도 쉽게 티티새 논쟁을 계속합니다.

이것은 가정뿐만 아니라, 사회나 교회생활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날, 교회의 기둥이었던 사도바울이 빌립보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일대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예상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현상들이 나타났습니다.

평소 의기소침해서 뒷전에 빠져있던 사람들 중에 사명의식을 느끼고 앞장서서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들도 생겨났고, 복음에 대한 애정은 있었지만, 바울이 싫어서 멀찌감치 뒷짐지고 서 있었던 사람들이 교회의 지도자로 급부상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시기심과 공명의식 때문에 예수님을 증거하기도 했습니다. 바울의 제자 중에 몇몇 사람들이 감옥에 갇힌 바울에게 이 못마땅한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바울이 사라지자 그 자리를 대신하는 사람들이 얄밉게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바울은 분노하기보다는 기뻐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립보서 1:18) 무엇이 인생의 본질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바울의 지혜가 돋보이는 말씀입니다. 티티새 논쟁은 언제든지 멈추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