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 취해 거리에서 큰 소리를 지르거나 노래를 부르는 것을 사자성어로 ‘고성방가(高聲放歌)’라 하는데, 이 사자성어를 초등학생에게 퀴즈를 내며 마지막 한 글자만 힌트를 주고 물어 보았다.

‘OOO(가)’

많은 단어들이 초등학생들의 답안지에서 나왔다. 고음불(가), 이럴수(가), 미친건(가) 등등. 그러나, 정말 모든 사람을 뒤집어지게 한 답안이 있었다. 그 답은 “아빠인(가)”였다.

폭소와 함께 씁쓸한 미소의 여운을 지울 수가 없다. 왜냐하면 아빠들은 아빠답지 못했던 미안함이 항상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학교에서는 “아빠와의 데이트” 수양회를 준비하고 있다. 나에게 만약 그 나이에 해당되는 아들만 있다면, 사죄하는 마음으로 그 수양회를 꼭 가고 싶은 심정이다. 혹 우리 아이들도 답안지에 “아빠인가”를 쓰는 날이 올까 두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 우리 아빠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문제아가 되어버린 우리의 아이들보단, 문제아로 자라가야 할 아이들이 그나마 잘 자라준 사실이 아닐까? 부족하고 미안한 아빠들의 과거대로 아이들의 장래가 정해진다면, 얼마나 많은 아빠들이 자신이 있을지 의문이다.

오히려 나에게 자녀들은 “엇갈린 축복”의 산 증인들일 것이다. 마땅히 받아야할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신 하나님의 “엇갈린 축복!” 마치 147세의 노구 할아버지 야곱이 손자들을 축복하며 엇갈렸던 기도의 손은 자기가 마땅히 받을 축복을 받으며 살아온 세월이 아닌, 하나님의 엇갈린 축복으로 수놓은 간증의 세월이었음을 의미하듯이 말이다.

십자가는 그런 의미에서 저주와 축복이 엇갈리는 장소다. 두 개의 나란한 직선이 인과응보대로 받는 심판이 아니라, 두 직선이 엇갈려 만나,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할 저주를 예수님이 받으시고, 대신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축복을 받는 현장이 십자가다. 이 고백이 아빠된 나의 고백이기에, 난 오늘도 잠든 우리 자녀들 위에 손을 얹고 엇갈린 축복을 간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