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 교회는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끝날 뻔했던 교회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육신의 병이 있어서 너무 허약해진 가운데 사역을 잠시 중단하고 쉬기 위해서 갈라디아에 갔습니다. 휴양과 병 치료를 위해 갔지만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병 문제로 인해서 육신이 약하다고 쉬거나 세월 허송하는 일을 허락치 아니하시고 그를 붙들어 충동하시고 성령으로 불같이 역사하셔서 갈라디아 사람들은 성령이 증거하시는 복음을 듣게 되고 성령이 무한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온갖 체험을 통하여 믿음의 뿌리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다른 곳으로 선교하러 떠났을 때 갈라디아 교회에 유대인들이 들어와 예수 믿는 것은 이단을 따르는 것이며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고 폄론하며 선동했습니다. 그럴 때 갈라디아 신도들이 성령으로 가꾸어 주신 믿음을 헌신짝 버리듯 내던지고 다시 율법주의적인 잘못된 선동에 미혹되어 구원얻은 것이 무효가 되는 폐단으로 넘어지기 시작했습니다.

1. 성령은 충만해야 한다

갈라디아서 4:12-14을 보면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합니다. 사도 바울이 육신이 병들어서 그곳에 쉬러 갔다가 하나님이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를 하심으로 복음을 전한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다’함은 바울이 다른 병자를 위해 기도해 주면 다 나음을 얻는데 정작 바울 자신의 병은 나음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다른 사람의 병을 고친 것이 아니고 그 병자의 병을 고쳐 달라고 하나님께 부탁 드리는 기도를 했을 뿐이며 병을 고치신 이는 바울이 아니라 하나님이셨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스스로 뭐든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주께서 능력으로 역사해 주셔야 모든 것이 가능해질 수 있다고 믿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그 사람을 통하여 온전한 능력으로 나타나는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2:7-9에서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에는 믿은지 얼마 안되는 사람들이 성령을 받고 하늘소망의 기쁨과 은혜는 충만했지만 바울이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면 귀신도 도망가고 병도 치유하는데 정작 바울 자신의 병은 고침 받지 못하는 상황으로 인해 시험에 들 수 있었지만 그로 인해 그를 업신여기거나 그것을 시험거리로 삼지 아니하고 갈4:15 말씀과 같이 도리어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멀쩡한 눈이라도 빼서 내게 주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그들은 영적인 성과를 위해 바울의 입장을 전적으로 이해하고 협력하며 눈이라도 빼서 바꿔주고 싶을 정도로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그렇게 성령 충만했던 갈라디아 교회에게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갈4:16)”고 말합니다. 악령을 물리치고 성령을 받아야 하늘 소망을 회복 받는다고 애타게 일깨워 줘도 오히려 마음의 벽을 쌓고 영원히 돌아서서 지옥으로 향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 함이라”(갈4:17)고 합니다. 즉 율법주의자 유대인들의 선동은 좋은 뜻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떨쳐 내게 하는 것이 목적이고 결국은 함께 지옥으로 가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2. 육체의 절제가 있어야 한다

본문 갈라디아서 5:16에 보면 “내가 이르노니 너희들은 성령을 좇아 행하라” 합니다. 그것은 성령이 앞장서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하고 따라가기만 하라는 뜻입니다. 육체의 욕심은 성령의 뜻을 거역하고 성령의 소원은 육체를 거스릅니다. 둘이 서로 대적하기 때문에 하늘 소망을 가꾸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거듭난 심령의 속사람은 하늘나라를 향하여 하나님 말씀에 순

종하고 성령께 이끌리어 쓰임 받는 것이 소원인데, 육체에 이끌려 세속적 욕구에 휩쓸리면 성령이 근심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되면 성령이 하나님께 직고하신답니다. 하나님께 보고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좇아 행하는 신앙생활을 계속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가 필요하고 목자가 있어야 합니다. 성령에 이끌려 생활하는 생활의 열매는 사랑하고, 기쁘고, 즐겁고, 화평을 시도하며, 오래 참고, 남을 불쌍히 여기며, 선한 뜻을 좋아하고, 하나님을 향한 충성이 있으며 성격 자체가 온유합니다. 이런 삶은 자기 기준이 아닌 예수님의 기준으로 살기 때문에 남들과 원수 맺을 일이 없습니다.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간에 그 사람과 나와의 관계에 있어서 예수님이 어떻게 보시는가를 기준으로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영적으로 사는 것이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절제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소망, 하늘나라에 가기까지는 육체의 세상 쪽으로 타락하려는 죄악된 생활을 절대로 할 수 없다고 딱 잘라 거절하는 절제의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성령에 이끌리며 성령과 더불어 영적인 소망을 목적으로 사는 사람은 아무도 가로막지 못합니다. 사탄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가 원하는 세속적 정욕은 회개하고 거듭 나던 날 그 시간부터 십자가에 예수님과 함께 못 박혀 죽었고 그 죽은 것을 장례치루노라고 세례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세례받은 사람은 절제하는 삶의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육이 죽어야 영이 살고 영적으로 살면 하나님께서 살리십니다. 본문 25-26에는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찌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찌니라” 하고 로마서 8:5에는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3. 성령님의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썬다씽 선교사 글에 히말라야 산 중턱에 3800미터 고지에 있는 랑겟 마을이 나옵니다. 썬다씽이 어떤 목사님과 그곳에 가서 부흥회를 했습니다. 산적들이 사는 깊은 산동네로 굉장히 높고 추운 곳이었답니다. 그런데 거기서 그 다음 해에도 부흥회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한해가 지나 그곳을 가다가 티벳에 계신 목사님 한 사람을 만나 함께 히말라야 산을 올라가던 중 큰 눈이 오는 바람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가던 도중에 신음소리가 들려 살펴보니 낭떠러지 계곡 밑에 어떤 사람이 눈 속에 묻혀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썬다씽이 티벳 목사님한테 저 사람을 구해서 함께 가자고 제안을 했지만 그 목사님은 도리어 썬다씽에게 인상을 썼습니다. 그래서 또 다시 겸손히 “우리가 부흥회 가는 것도 영혼을 살리기 위한 목적인데 사람이 부흥회 참석해야 그 영혼이 살 것 아니겠느냐”면서 설득을 해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로 한 번 더 저 사람을 구하러 내려가자고 권유했더니 해가 져서 이미 어둡고 기온은 영하 20-30도 아래로 떨어지고 있는데 그 사람을 구하려다가 우리까지 죽게 될거라고 하면서 거부했습니다. 그래도 한 번 더 간청을 하니 “당신 같은 사람하고 부흥회 하려고 같이 다니는 내가 바보다. 나는 내일 부흥회를 위해서 먼저 간다”고 하고 가버렸습니다. 내일 부흥회를 위해 먼저 간다고 하는 그 목사님을 탓할 수는 없었습니다. 다만 썬다씽의 마음 속에서 성령이 “저 사람을 두고 가면 안되고 저 사람을 살려 내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내일 부흥회는 내일 일이고 오늘은 저 사람 살리는 것이 네가 할 일이다.” 어렵게 나무 뿌리들을 잡고 절벽 아래로 내려가 눈을 헤치고 보니 그 사람은 발목이 부러져 걷지도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래도 주님께 힘 주시기를 간구하며 그 사람을 붙들어 일으켜 등에 업고 두 팔로 자신의 목을 안으라 하고 나무 뿌리들을 붙들고 매달리다시피 해서 올라오니 땀에 흠뻑 젖었습니다. 그 사람을 계속 업고 그 길을 가는데 등에 업힌 사람이 발목은 부러졌지만 자꾸 말을 붙여 이야기를 합니다. 그 사람은 썬다씽이 온다고 해서 은혜받기 위해 가게 문을 일찍 닫고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가던 길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썬다씽은 자기가 썬다씽이라고 밝히면 이 사람이 업혀가지 않을 것 같아 자기도 은혜 받으러 가는 길이라고 말을 합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체온으로 몸도 얼지 않고 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업고 가다가 발이 장애물에 걸려서 둘이 나뒹굴어졌습니다. 발로 눈을 헤치고 보니, 어제 저녁에 먼저 간 사람이 그만 발에 동상이 걸린채 넘어져 동사했습니다. 그래서 살고자 하면 죽고 복음을 위해서 죽고자 하면 사는 법을 여기서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날 그 발목 부러진 사람이 아니었다면 썬다씽도 가다가 티벳 목사가 얼어 죽은 그 자리에서 얼어 죽을 것을 하나님이 미리 아시고 은혜 받으러 가는 사람을 낭떠러지에 미끄러지게 하시고 발목이 부러져 넘어지게 해서, 두 사람이 그 사람을 교대로 업고 가서 세 사람 다 영하 40도가 되는 추위를 이겨 낼 수 있도록 섭리하셨다는 것입니다. 썬다씽은 성령에 이끌려서 성령의 지시와 감동을 따라 성령을 좇아 행하는 영적인 사명자였습니다. 그러나 티벳 목사는 목사님은 목사님인데 성령을 받지 못했고 성령에 이끌리며 쓰임 받는 성령을 좇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랬기에 하나님의 이런 섭리 가운데서도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내가 육적으로 사는가 영적으로 사는가, 순간순간 어떤 상황을 접할 때마다 이 일을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 영적기준으로 아니면 육신의 입장으로 어느 편으로 할 것인가를 잘 생각하고 부디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살다가 하늘나라 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