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는 멸종된 황새를 복원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 그 복원사업장에 황새 한마리가 짝짓기를 하지 못하자 혼자 둥지를 틀고 돌맹이를 줏어다가 제가 낳은 알처럼 이리저리 굴려가며 열심히 품고 있는 것을 보았다. 사육사가 돌맹이를 치우면 또 비슷한 것을 주워다가 아랑곳없이 정성을 다해 품는 모습이 눈물겹다.

우리말에서 품는다는 말은 매우 따뜻한 말이다. 어느 나라 말에 엄마가 아기를 가슴에 꼭 품는다라는 표현이 있을까 보냐! 사람이 살아가면서 어머니 품에 안겨 자랐던 기억을 되살리기만 한다면 이 세상은 조금 더 살기 좋은 곳이 될 터인데 요즘 엄마들은 자신의 품을 자식들에게 내어주기를 거부하는 까닭에 점점더 각박한 세태가 되어가지 않는가 하는 생각은 잘못된 것일까?

예전에는 많은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가슴에 품고 가르쳤다. 내게 국어를 가르쳐주신 하동호 선생님 수학을 가르쳐주신 정인영 선생님의 넓은 품은 평생에 잊지 못할 인자한 품이다. 요즘은 학생들을 품고 가르치려는 선생들을 만나 보기 어렵다. 될 수 있는 대로 거리감을 적당히 유지하는 것이 최상의 사도(師道)라 하니 이 어찌할꼬! 한숨만 나온다. 그것뿐이 아니다. 정말 성도들을 가슴에 품고 울며 불며 기도로 키워내는 목자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데 더 큰 문제가 있다. 혹 이 사람이 내 목회에 어떤 장애물이 될까 해서 접근금지구역을 정해놓고 너는 너 나는 나하면서 대면 대면하니 돌품는 황새보다 못하다 할 것이다. 예전에는 한손에 파리채들고 한손에 성경들고 산동리를 헤매고 다니면서 코흘리개들을 품어주던 성자들이 많았다. 성전 마룻바닥을 눈물로 흥건이 적시면서 교인들의 이름 하나 하나 불러가며 기도하던 그 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나이들어서 새 친구를 사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나는 몇 년 전에 새 친구를 사귀었는데 수십년지기만큼 절친하게 지내고 있다. 이 친구는 정말로 남의 일을 제일처럼 돌아보는 사람이다. 그가 목사임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좀체 다른 사람이 흉내 낼수 없을 정도로 남을 돌아본다. 그는 아이를 좋아해서 온 교인들이 일이 있으면 이 분에게 아이를 갖다 맡겨놓고는 뒤도 안돌아보고 줄행랑을 친다. 그러면 아이들은 태연하게 이 할아버지 목사품에 안겨 방긋 방긋 웃으면서 잘도 논다. 그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이제는 하도 오래해서 노하우가 있다고 말하지만 나는 안다. 그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나는 그를 예품이라고 부른다. 예수를 품고사는 이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