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갑을 넘긴 나이에 중국 길림성 도문시(圖們市)에 선교사로 파송돼 8년간 장애인 사역을 해 온 고순영 선교사(75)를 만났다. 그는 2003년 남편 고영집 선교사(77)와 함께 충현선교교회를 통해 파송된 후 두만강 하류 북한 회령과 마주한 도문에 장애인특수교육학교 은혜원을 세워 장애인과 장애아동 30명을 돌봤다.

미국에서의 장애자 훈련 경험과 그룹 홈(성인 장애인들을 양육하는 공동체) 자격증을 갖고 있는 고 선교사는 반복학습을 통해 장애아동 30명 중 8명을 초등학교에 진학시켰다. 처음에는 교장 선생님이 장애아들을 학교에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지만 고 선교사는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 안에는 불가능이 없다’는 믿음으로 밀어붙였다. 이들을 초등학교에 진학시키기 위해 지도했던 6년 반의 시간 동안 한 자리 덧셈을 가르치는 데만 수천번, 수만번의 반복학습이 필요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그와 아이들은 해냈다.

장애인들에 대한 사회 인식이 낮은 중국 사회에서 장애아들이 학교생활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다.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는 일도 부지기수다. 그는 이처럼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장애아들을 돕고 있는 선생님들에게 “장애아들은 하늘에서 심어놓은 보화입니다. 이 아이들의 가능성을 보고 노력해 보십시오. 제가 6년 반 가르치니 그들도 해냈습니다”라고 말하며 그들이 장애아를 가르치는 일을 포기하지 않도록 격려한다.

그는 또 학습 수준이 부족한 장애아들에겐 청소하는 법을 직업교육의 일환으로 가르쳐 사회생활을 할 수 있게 돕거나 농사짓는 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그분의 자녀들을 보내실 때에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보내셨습니다. 목적 없는 인생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보화가 있습니다. 그 보화를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일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 자기 몸 하나 간수하기도 벅차지만 고 선교사 부부가 장애인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이유는 장애를 갖고 태어난 아들 관필이 때문이다. 44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지금은 하늘나라에 가 있는 관필이는 이들 부부가 장애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만든 특별한 존재이다.

고 선교사는 한국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던 중 남편을 만나 결혼해 관필이를 임신했다. 임신 당시 결핵성 골수염을 앓고 있던 그에게 의사는 뱃 속의 아이를 유산하라고 권고했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이니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아이를 낳았다. 어렵게 세상에 나온 관필이는 태어났을 때 극심한 영양실조 상태였고 의사는 오래 살지 못할 거라고 단정했다. 아이는 8개월간 인큐베이터 안에서 지내며 생명을 유지했으나 4살이 되어도 제대로 서지조차 못했다. 관필이를 위해 한시도 빼놓지 않고 기도하던 고 선교사에게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이의 병을 고치기 위해 미국으로 가라는 마음을 주셨다.

아이의 병을 고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미국에 온 그는 한국에 남겨 두고 온 남편과 세 아이를 미국으로 초청할 수 있는 영주권을 받기 전까지 식모살이를 하며 신앙의 힘으로 고통을 감내했다. 상상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아들의 병을 고칠 수만 있다면 어떤 고난이라도 감수하겠다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결국 온갖 고생 가운데서 고 선교사는 여호와 이레의 기적을 맛보게 된다. 영주권을 받은 것이다. 그의 초청으로 남편과 아이들은 미국으로 건너올 수 있었지만 정작 관필이는 미국 정부의 장애인에 대한 재정 방침(5년간 정부의 지원을 받지 않는다는 계약을 해야만 올 수 있음) 때문에 올 수 없었다. 관필이의 병을 고치겠다는 일념 하에 모든 고통을 감내해온 그로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한쪽 문을 닫으시면 다른 문을 여시는 하나님께서 고 선교사를 병원에서 간호조무사로 일하게 인도하셨다. 그리고 그 일을 계기로 병원 보험을 들 수 있게 되어 관필이를 미국으로 데려 올 수 있었고 마침내 관필이는 하나님의 은혜로 존스홉킨스 병원의 최고의 명의를 만나 치료를 받았다.

이러한 장애를 지니고 있던 자녀를 향한 사랑이 더 큰 사랑으로 열매 맺어 중국 장애사역으로 꽃피게 된 것이다. 선교사 노부부는 2003년부터 2010년까지 중국에서 1천4백여 명의 중국의 가난한 학생들에게 7만불의 장학금을 수여해 왔고 150대의 휠체어를 보급해 왔다. 뿐만 아니라 생활비 및 주택 보조 등 빈민구제사역과 병원비, 약값 등 의료비를 꾸준히 보조해 왔다. 장애인교회 및 농아교회(가정교회)를 운영해 많은 장애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으며 은혜원 졸업 후 갈 곳을 찾지 못한 학생들을 위한 그룹 홈 사역도 감당했다.

 
▲(위)고 선교사 부부는 중국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아래)고영집·고순영 선교사.
 


만 60세까지로 제한되어 있는 중국 정부의 체류 비자 규정에 따라 중국에서 더 이상 사역을 지속할 수 없게 된 고 선교사 부부는 작년에 필리핀으로 파송돼 선교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들은 중국에서 장애인 사역을 해 온 것과 달리 필리핀에서는 고아들을 위한 은혜원(The Grace Home)을 세울 계획이다. 현재 고아원은 공사 중이며 6월이면 완공된다. 365일 아이들을 돌볼 시설 뿐 아니라 앞으로 일반 교회도 지을 계획이다.

은혜원 건축에 드는 비용만 해도 10만불 가량 필요하다. 그간 선교하면서 알게 모르게 헌금해 준 것을 다 투자하고도 2만불이 모자란 상황이다. 전기도 없고 수도도 들어오지 않는 동네라 6백여 미터 떨어진 이웃동네에서 끌어다 공사하고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필리핀 정부의 허가도 받아야 하니 쉬운 상황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 선교사는 “선교는 하나님께서 하시고, 우리는 그분께서 쓰시는 도구일 뿐”이라며 얼굴에 걱정하는 내색 하나 없다.

재정적 어려움 외에도 이들에겐 또 하나의 넘어야 할 산이 있다. 바로 육신의 고통이다. 아내 고순영 선교사는 2001년 갑상선암을 시작으로 폐암이 오고, 성대암, 결핵성 골수염까지 성한 데가 하나도 없다. 백발의 아내는 항암 치료 후유증을 감당하기 힘들어 선교하기가 버거울 정도다. 이제 그만 선교사를 사임해도 되지 않겠냐는 아내의 말에 남편 고영집 선교사는 “생명을 주시는 한 이 일을 멈추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고 선교사는 선교지에 남편을 두고 홀로 항암 치료를 위해 LA에 왔다 갔다 하면서 미주 한인교회를 순회하고 선교 간증을 해 오고 있다. 치료차 선교지에 남편을 두고 떠나올 땐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어 보지만, 교회에 가서 간증집회를 하고 나면 받은 은혜가 너무도 커서 “하나님, 제가 잘못 했어요. 제게 주신 소명보다 육신을 더 사랑한 죄를 용서해주세요”라고 회개하고 만다.

오는 6월 말에 필리핀으로 돌아갈 예정인 고 선교사는 “황무지에 꽃을 피우기 위해선 많은 기도가 필요하다”며 은혜원 건축이 무사히 마무리될 수 있도록 기도 후원을 요청했다.

“우린 약함이 강함 되는 것을 직접 목격한 증인입니다. 약할수록 하나님께서 더 크게 역사하시는 것을 알기에 오늘도 그 믿음으로 나아갑니다.”

고영집·고순영 선교사에게 후원하려면 다음 주소로 체크를 보내면 된다. Pay to Order : CHMC(충현선교교회) Check 밑에 고영집 선교사 지원이라고 꼭 기록해야 함. Address Mail to : CHMC(Choong Hyun Mission Church) Attn: Rev. Jimmy Kim  5005 Edenhurst Ave. Los Angeles, CA 90039 한국: 국민은행 (예금주: 고순영) 계좌번호 402601-04-025860 이메일: thegracehome@gmail.com